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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휴게소]-2015_04월_01주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5. 3. 31. 11:55

[iad]

[댓글휴게소]-2015_04월_01주 

10gfl--2015-04월_댓글보전.txt

http://story007.tistory.com/1047 

http://story007.tistory.com/entry/댓글휴게소-201504월01주 


진행중  논의 페이지 안내

● 03fl--나-인식의-주체.txt 
http://thegood007.tistory.com/1184 









 



◆vmpo4076

◈Lab value 불기2559/04/05/일/21:49


♥ 잡담 ♥pun님의 도발적 질문

pun 님이 갑자기 나타나 



본인의 글을 검토하면서 
왜 문제만 제시하고 답을 제시하지 않았는가를 묻는다. 

원각경 내용과 관련된 내용을 적으면서 
...

왜 본래부터 보리가 갖춰진 상태라면서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되었는가. 

이런 의문을 갖기도 한다고 한다.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

[ 참고] http://story007.tistory.com/1047#mirror


이렇게 적어 놓은 것을 보고 
위 문제에 대한 답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망상분별을 하는 중생이 본래 본각이었다면 
지금 깨닫는다면 또 언제 다시 망상분별을 일으켜 가질 것인가. 
이런 의문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본각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문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중생들이 모두 하나같이 본각을 내장하고 있다는데 
왜 지장보살은 매번 삼악도를 헤매는 중생들의 옥바라지를
무한한 기간에 걸쳐 해야 하는가. 
이런 의문도 제기할 수 있다. 


요즘 닭들은 병아리로 태어나서
철장에 갇힌 채 닭으로 활동하다가 
한 몇 개월 지나면 도축이 된다고 한다. 

이런 닭의 일생을 광범위한 윤회과정으로 생각하면 
이는 어떤 중생이 대략 3 개월 형을 받고 
감금 생활을 하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몸을 바쳐
과거의 빚을 일부 청산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연이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정말 그 상황은 억울하고 힘들고 
고통스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수행자가 자신의 과거를 검토할 때 
그런 형을 받을 만한 사유가 없고 
그런 빚을 진 일도 없는데 
그런 상황에서 닭으로
그런 닭장에 갇혀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 금강경에서 
말씀하신 가리왕에게 체포되어 
손발을 잘리우는 상태에서도 
상을 일으키지 않고 
평안히 참는 안인수행을 하는 상황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 지금 편하다고 
내일도 또 다음 내일도 무한히 편한 것은 아니다.

생명들이 처한 상황을 전부 나열해 놓고 
생각해보면 
확률상 평안함을 느낄 상황에서 지내기보다는 
그렇지 못할 확률이 대단히 높다고 보게 된다. 

그런 확률의 문제는 
손 안의 흙과 산의 흙을 비교하는 상황과 같게 된다. 

이제 이런 여러 차별적인 상황과 
본각의 문제와 관련하여 
원각경에서 제시한 내용에 동일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런 질문에 답을 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라고 본다. 

망상분별이 생겨나고 없어지고 하는 것 자체가 
망상분별 안에서만 있는 일이다. 

본각의 바탕에서는
그런 일 그런 생멸 자체가 
없는 것이다. 
본래 그런 것이 없는데
다음에는 또 언제 생기고 또 언제 멸하는가 
언제 다시 보리를 얻는가 이런 것을 
논의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언젠가 최면에 걸린 이들이 
최면 속에서는 무엇이 생겨났다 멸했다 하는 것을 
생각하더라도 

최면 밖에서 이를 지켜보는 관객입장에서는 
도무지 그런 일 자체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관계가 같다고 본다. 

본인의 답이 옳다는 것은 아니고 
위 문제는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지장보살님은 지장보살님대로 
또 초발심 수행자는 수행자대로 
그럼에도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그래서 이 문제와 저 문제를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면, 
이는 크게 문제되는 내용이 아니라고 본다. 

mun 님이 불어 노래가운데 paradise 의 노래를 
옥바라지란 노래로 해석했는데 

동영상을 보니 정말 지장보살이 옥바라지를 통해 
중생을 제도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http://story007.tistory.com/1047#paradis

그런데 이런 동영상 내용이 우연이겠지만,
모두 꼭두각시 인형을 통해서 보여진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또 본각과 환 속의 일로서 
중생제도의 관계와 사정이 같다고 본다. 

그런데 꼭두각시로 표현된 환 속의 중생을
그렇게 묶어 놓은 것은 또 바로 환 속의 번뇌다. 

그리고 중생들은 이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고 사역을 시키는 활동을 하다가, 
어느 순간 그런 입장에 처한 다른 중생을
자신이 구하면서
또 자신도 구원의 열쇠를 얻어서
구제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전체가 
모두 환 속의 일인 것이다. 
그리고 환 속에서 이런 생멸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환을 떠나서는
그런 일은 본래 없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열심히 제도를 행한 보살도 
힘이 빠질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내용이 바로 금강경에서
제시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
무한한 중생을 제도한다. 
그러나 제도되는 중생은 하나도 없다 .
...

바로 이 대목이 앞의 내용과 관련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는 망상분별과 환 속의 일이고 
하나는 그 망상분별을 벗어난 상태에서의 내용인 것이다. 

이 둘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원각경에서 제시된 본각과, 
또 중생이 깨닫고 열반을 증득한다는 등의 일이
서로 이상하고 모순되는 관계라고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늘 감각현실과 관념의 관계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나무 풀 등의 모습 등을 보면서 
이것을 나무라고도 하고 
또는 전체를 숲이라고도 하는데 

그러나 관념영역에서 그렇게 나무라고 생각하던 
숲이라고 생각하던 
그에 따라 감각현실에서 그런 나무나 숲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 생각이나 그런 감각현실과 같은 내용이 
진여 실재에도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내용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 나무나 숲을 생각할 때 
그것은 그렇게 있는 것 같다. 

다시 더 세분해 분별해 
나무엔 나무가지도 있고 
잎도 있고 이런 식으로 말하면 
또 그런 내용이 그 안에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것은 모두 그 망상분별 안의 일이다. 

그런 분별을 하던 말던, 
또 그런 분별이 사라지던 말던
원래 감각현실이나 실재는 
별 관계없이 감각현실이고 실재인 것이다. 

이것이 앞의 본각과
번뇌와 수행과 중생제도와 깨달음과 열반의 증득의 관계와 
같다고 본다. 

분별 속에서는 있는 일이 
이 쪽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불교 공부하면서
각 언어표현에서
세속제와 승의제의 관계를 
혼동하고 
오해를 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고 본다. 
주의할 점이라고 본다. 


가끔 불어 노래에 
영어가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한국노래도 영어를 섞는 경우가 요즘 많다. 



불어 노래에 한국어가 들어 있다고 mun 님이 주장하는 데 
시감상방법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이 정상상태가 아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Au Paradis 란 노래가  
지장보살이 지옥에까지 따라가 중생을 옥바라지 해서 구제한다는 내용이라는 것이 
어떤 기반에서 나온 해석인가를 물어보고 
그 답변에 따라 상태가 심각하다고 판명되면 
mun님을 병원에 입원시킬 예정이다. 

불어 노래를 들을 때 시감상을 해 듣더라도
영어부분이 섞여 나오면  
이 경우는 또 시감상을 적용하지 않고 
그런 영어 의미로 알아듣게 된다. 

그런데 mun 님의 해석을 듣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sorry angel => 소리 속에 천사가 활동하고 있다  

시감상 내용에는 일절 그 감상 근거를 묻지 말아 주세용 
그러나 한마디 한다면, 
관세음보살을 념하고 노래를 들으면
원 가사와 관계없이 그런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고 봅니당. 



○ [pt op tr] mus0fl--Serge Gainsbourg - Sorry Angel.lrc







문서정보 ori http://story007.tistory.com/1047#4076
10gfl--2015-04월_댓글보전.txt ☞◆vmpo4076
 









◆mrji3192

◈Mun Tokyun 2015/04/05/일/19:26


♥ 잡담 ♥광범위한 망상적 시감상 세계

불어 노래를 시감상방법으로 듣게 되면, 
사실 한국 노래에서는 주제로 다루기 힘든 
여러가지 주제를 노래 부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little 님이 올린 노래는 
지장보살이 중생들이 지옥에 들어가 있는 데 
옥바라지를 하는 노래라고 해석한다. 

이런 상태를 노래부르는 것이 가능한가. 
그러나 불어 노래는 과감하게 
원수를 해치다가 지옥에 간 이를 
지옥에까지 따라가서 옥바라지해서 
구제한다는 내용이 제시된다. 


옥바라지란 감옥과 관련없는 생활을 한 입장에서는 
낯선 단어다. 

인터넷 사전에서 다음 풀이가 나온다. 

옥바라지 -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옷과 음식 따위를 대어 주면서 뒷바라지를 하는 일.



lab 님이 처음 아후쿵텡풍텡테를 
각종 노래에 실어 보낼 때부터 
이것을 알아채긴 했지만, 놀라운 일이다. 

옥바라지를 주제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세상에 있는 것이다. 


lab 님이 망상증환자의 증세로 

꽃을 보고 우주선 기지라고 생각하는 이를 예로 자주 드는데 

이것이 본인의 연구결과
망상분별이 아님이 밝혀졌다. 


lab 님에 의하면 

염색체가 분열하고 세포분열하는 과정을 

관찰하여 학계에 보고한 생물학자는 

전부 망상 분별 편집증세에 시달리는 환자이고
이런 망상분별 편집증에 시달리고 시달리다 못해서 

그 망상분별을 학계에 보고한 이처럼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 


꽃 모습을 놓고 꽃으로 보는 이들은 사실 단순한 것이고 

이것이 외계인의 우주선 기지로 보는 것은 

상당히 과학적이고 올바른 생각이라고 본다. 


우선 한 생명체가 자신의 생존을 계속하고 

자신의 개체를 번식시키는 과정에서는
다양한 방식이 있는데  

우선 이 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생존을 계속하고 개체를 번식시키는데 
교묘하게 
그 과정에서 아무런 생명체도 고통을 호소하지 않거나 
가장 최소로 고통을 호소하게 하는 가운데 
이 문제를 모두 해결한다. 

그리고 자신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가지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내서 
다른 생명이 열심히 
주변을 가꾸도록 만든다. 

사실 이 모든 것마저도 직접 다 할 수 있는데 
왜 이 생존과 생식문제를 이렇게 해결하는가가
이 경우 의문이 된다.

그것은 결국  
다른 생명체와 균형을 맞추어 
적절한 정도로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꽃이다. 

그 꽃을 통해 
그럴만한 생명체가 주변에 있는가, 
환경이 되어 있는가를 
타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런 목적을 위한 
우주선 기지라고 보아야 한다. 

이런 연구결과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이것을 누가 이렇게 계획해서 
외계에서 지구에 제공했는가. 

본인 생각에 
아주 지혜가 발달한 외계의 
보살형 생명체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거꾸로 인간이 가장 바람직한 
생존과 생식형태를 생각하고자 할 때도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새 노래를 듣다가 올리는데 
이 노래에서 자꾸 자신의 법명을 불러 댄다고 
오해하는 이가 주변에 있다. 

불어 학원에 등록하여 불어를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한 
이 증세는 멈추어 지지 않으리라 예상한다. 

불어라곤 아모레나 모나미 밖에 잘 모르는 상태에서 
lab 님에 의해 듣게 된 노래들이지만, 
가끔 무아도 직접 노래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똥을 과감히 똥으로 발음하면서 
노래부르는 불어 노래를 어느 덧 사랑하게 된다. 






○ [pt op tr] mus0fl--Johnny Hallyday - Retient La Nuit.lrc





문서정보 ori http://story007.tistory.com/1047#3192
10gfl--2015-04월_댓글보전.txt ☞◆mrji3192
 






◆pecw7749

◈Prince evilstupidmiserable Little 2015/04/05/일/18:42


♥ 잡담 ♥궤변의 종말

사람이 나이가 들어 치매 증상이 시작되면 
기억력도 감퇴하고 사물에 대한 분별력도 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정도가 심해지면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태가 되면, 주변에서 간병하기가 훨씬 힘들어진다. 

이 경계를 치매 환자는 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치매 자체가 치매 환자의 뜻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치매 환자가 되면 사실 
기억력이나 분별력도 떨어지고 
대소변도 못 가리는 
아이와 같이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가 똥오줌을 못가리면, 부모는 이 아이를 보고 
크게 야단치지 않는다. 오히려 부모는 이런 아이에게 애정을 갖고 
또 이들이 
장차 똥오줌을 분별하고 가리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치매환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우선 자식들이 부모의 똥오줌을 그렇게 봐주지를 않는다.
장차 부모가 치매가 나아 다시 분별력을 갖고
수입을 만들어가져 오리라고도 보지 않는다.
이 부모가 죽을 때까지 이런 식으로 자신을 괴롭히다가 
그냥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lab 님이 전혀 피가 섞이지도 않은 
본인에게
전생에서의 형제 자매임을 운운하면서, 
치매환자인 자신의 병 간호를 무한하게 
해주기를 바란다거나,  


또는 연구 중에 방귀를 자주 뀌어서 
그저 냄새가 독한 방귀인 줄 알았더니, 
대변을 앉아서 싼 것이라면, 
이것을 lab님 표현대로
망상분별이 치유된 상태라고 환영해주어야 하는가. 

사정이 그렇지 않은데 
계속해서 이상한 주장을 펼치는 것은 왜인가. 

lab 님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치매상태가 되고 
대소변을 못 가리는 상태가 되면 
주변 사람들이 
사실 모든 힘든 부역에서
그를 제외시키게 된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사실은 알 것은 다 알면서 
대소변으로 벽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물론 너무 귀찮아서 죽을 상태에 
방치하고 떠날 수도 있다. 

그러니 수행자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극한을 넘어서는 일이다. 

이러면서 다시 극심한 무분별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누가 치료가 필요한가. 

무작위 선택곡에서 
Au Paradis 란 단어가 자주 나온다. 

이 소리를 듣고 옥바라지를 누가 하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다. 

시사하는 바가 큰 노래라고 생각하게 된다. 
누구에게는 천국과 같은 상태가 
다른 이에게는 옥바라지 하는 상태라고 여기는 
현상이 이와 관련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치매환자가 보는 세상과 
치매환자의 가족이 바라보는 세상모습이 
이처럼 서로 다른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paradis





○ [pt op tr] mus0fl--Gérald De Palmas - Au Paradis.lrc



문서정보 ori http://story007.tistory.com/1047#7749
10gfl--2015-04월_댓글보전.txt ☞◆pecw7749
 









◆vwuv7283

◈Lab value 불기2559/04/05/일/11:00


♥ 잡담 ♥감각현실에 대한 망상분별

'2+2 = 5 이다'라는 명제가  참인가 거짓인가를 따지는 논의는  
오래 전에 mun 님과


진행한 논의다. 

이것을 찾아서 링크로 붙여 놓기로 한다. 

○ [pt op tr] http://buddhism007.tistory.com/674 ☞2 더하기 2 는 4 가 아니라는 주장





그런데 이처럼 '2 더하기 2 는 5 다'라는 명제가 참인가가 문제될 때 
관념에서 감각현실에서 그리고 실재에서 
이에 관한 증거를 확보할 수 없기에 
참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안타까움에 봉착하게 된다. 

mun 님이 감각현실과 관련해 진행하는 정신 분석의 실험과정에서
처하게 되는 어려움을 아래에 밝혔지만, 
관념이 처한 사정도 
감각현실이 처한 사정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우선 관념에는 다음 문제가 있다.

각 사람이 각 순간에 생각해내는 관념은
늘 그 순간의(현재) 관념이다.

그 당사자는 그 관념이 과거에 얻은 관념내용 그자체다. 
또는 과거에 기억한 내용과 '일치하는'  '같은'  내용이다. 

이렇게 주장하지만, 
매 순간 생각해내는 관념은 사실은
그 순간에 얻는 관념인 것이다. 

그런데 그 관념이 과거에 얻은 그 관념자체라거나, 
그 과거의 관념과 일치하고 같은 관념이라는 주장은
이것이 정말 참인가가 문제되기에
이것을 놓고 다시 이것이 정말 참인가 아닌가를 
새로 따지고 밝혀야 할 주장이 된다. 

2 + 2 를 놓고 이 문제를 검토하는 과정에 
바로 이 문제가 다 관계되는 것이다. 


엄밀한 이런 문제제기에
자신이 지금 생각하게 되는 관념은 당연히
과거에 자신이 얻고 기억했던 그 관념 그 자체라고 주장하고 
억어지를 계속 주장하는 이들이 현실에는 대단히 많다. 

mun님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그것은 mun님의 경험상 자신이 과거에 외운 다라니를
자신이 지금 떠올려 다시 재생해 보고 
원문이라고 생각하는 내용과 그것을 다시 대조해보면서 
그것이 정말 일치한다고 반복 경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지금 생각하는 관념이 과거에 얻은 관념과
일치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어떤 문서나 증거를 통해 확인해 보는 과정은
사실은 지금 논의하고 있는 문제 
즉, 감각현실과 특정 관념을 놓고
이들을 서로 대응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가를 따지는 문제가
그 안에 다시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본인을 놓고 보면 
현재 떠올리는 관념이 반드시 과거의 그 관념과 일치한다고 볼 수 없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본인의 다라니 암기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본인이 어제 외운 다라니를 지금 재생해보려면
우선 잘 생각이 나지도 않지만,
생각이 난다해도 바로 원문을 꺼내 확인 대조해보면
그것이 그렇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확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mun 님이 자신의 경험만 놓고 보면
자신이 당장 재생해내는 관념은 
과거 그것을 처음 대해 가졌던 과거의 관념 내용과
그대로 일치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지만, 
본인 때문에 그렇게 쉽게 곧바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참고로 다음 다라니를 놓고 
1 시간 외우고 자신이 실험해 보기로 하자. 
위 내용이 지금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참고 

k0294sf-- ☞나모 라뜨나 뜨라야아야

http://buddhism007.tistory.com/682#dharani



그래서 어떤 관념을 가질 때 
그것이 문제되는 과거의 관념과 그대로 일치하는 관념인가가 문제되면, 
정말 그런가 아닌가를 일일히 매번 따져보고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 이유가 이미 앞에 기술되어 있다. 
매번 떠올려 생각해내는 관념은 매번 그 순간의 관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떠올리는 관념이 과거의 그 관념인가는 
늘 참임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것은 궤변적 주장이 아니고
정신작용에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진술한 것이다. 

감각현실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앞의 경우보다 조금 더 심하다고 할 수도 있다. 


mun 님만 보면 감각현실에 대해 일으켜 갖는 관념이 
적절한 내용인 것처럼 넘어가야 할 것 같기도 하다 .
mun 님은 적어도 자신이 갖는 관념이 
망상분별임을 이해하는 가운데 
그 관념을 문제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우가 조금 다른 little 님을 비롯하여, 



정신병동에 갇혀 지내는 망상증환자 및 
최면쇼에 등장하는 최면걸려 엉뚱한 반응을 보여주는 관객들 때문에 
일반적으로 대부분 경우에
그렇게 바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안타깝던, 안타깝지 않던 현실사정이 그렇다. 

그러나 어떻게 이를 총체적으로 망상분별이라고 
진단을 내리게 되었는가는 최소한 이해해야 한다. 


감각현실을 얻는 가운데 관념도 같이 얻는 보통의 경우엔 
감각현실만의 고유한 특성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일단 감각현실이 갖는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분별이 전혀 행해지지 않고 멍한 상태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노란색도 노란색으로 보고 
하얀색도 하얀색으로 구별해 보는 것은 
위 상태에 해당되지 않는다 .

멍한 상태는 그런 감각 내용이야 그대로 얻는다고 생각되더라도 
그 각 부분이 무엇무엇인가 그런 생각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감각현실을 놓고
여기에 대해 어떤 부분을 나누고 묶고 한 다음 
그 부분이 무엇이다라고 할 때는
이미 상당한 관념 분별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

그래서 이 경우부터
이 관념을 통한 망상분별 증세의 증상을 검토해 나가야 한다. 

이것의 참 거짓을 검토하려면 실험을 해야 한다. 
일종의 정신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에 mun 님이 밝힌 내용은 
이 실험이 당장 부딪히게 되는 한계를 제시한 것이다. 

이 실험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감각현실을
정신 분석 실험실(정신실험을 진행하는 정신영역)안에서 확보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를 얻어 유지할 도리가 없다. 

매 실험 순간 그 순간에 각 주체가 내부 주관에서 
얻는 감각현실만 얻을 수 있다. 
또 이 감각내용은 다른 이와 공유할 수도 없다. 

이런 것이 이런 실험이 갖는 한계다. 

또한 이런 감각현실을 놓고 검토할 때 
앞과 같이 그 각 부분을 나누고 묶는 관념작용을
이런 감각현실 안에서는 찾아낼 수 없다. 

즉, 감각현실 영역에서는 
최초의 관념분별이 행해질 때 행해지는 이런 작용을
얻어내지 못한다. 

더 나아가 그 감각영역에서는 
있다 없다 무엇과 같다 다르다 등의 관념도 역시 얻을 수 없다. 

한편 관념 영역도 사정이 비슷하다. 
감각현실에 있는 어떤 내용도
관념 영역에서 그대로 얻지 못한다.

관념 영역에서 이들에 대해 판단을 진행하려면,
감각현실의 어떤 내용을 
분별 판단이 진행되는 영역에서 얻어야 
이 감각현실을 놓고 무언가를 밝힐 것 아닌가. 

그런데 
감각현실은 감각영역에
각 순간에 얻는 그 내용만 그대로 있고(?) 
또 관념 영역에 있는 것은
또 관념내용들 뿐이라는 점이다. 

감각현실에는 관념에서 행하는 그 최초의 
영역 분할(구분)이나 묶음도 적용되지 않고 
또 그렇게 나뉜 부분에 대응시키는 관념내용도 얻을 수 없다. 

관념영역에서도 사정이 반대로 비슷하다. 
감각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정작 관념영역에서는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내용을 함께 한 주체가 같이 얻고 있는 경우에는 
이런 문제제기가 도무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문제되는 것인가를 알지 못한다. 
이들 내용을 다 함께 얻고 있다고 
그가 생각하기에 
이 둘의 관계는 직관적으로 참임을 알 수 있다라고만 
자꾸 되풀이하게 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문제다. 

망상증환자가 일정한 감각을 하면서 엉터리 관념을 매번 생각해내거나, 
또는 최면 걸린 이가 매번 양파를 딸기로 알고 먹는 경우처럼
감각현실과 관념을 관계지을 때 
그 관념판단의 진실성이 문제된다.

그리고 일반인의 상태는 적어도 이런 상태와 
다르고 옳은 판단이라고 주장하고자 할 때는   
감각현실과 관념의 두 내용을 놓고 
이들을 관계시켜 대응할 때
여기에서 앞의 관계와는 달리, 
그런 관계가 옳다고 판단해야 할 근거가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앞 내용이 모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실험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사정이 이렇기에 
그 감각현실에 대해
이런 판단도 저런 판단에 대해서도 모두 
참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 

그래서 기본적으로 이런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실험이 이런 한계가 있음을 제시하자, 
어떤 이는 이렇게 잘못 생각하게 된다. 

사정이 이렇기에 
자신이 엉터리 주장을 설령 한다해도 
심지어 그것이 망상분별이라고 해도 
그것이 거짓임을 단정해 밝힐 내용을 
상대는 제출할 수 없다. 

사정이 그렇다면, 
이런 상태에서 자신의 엉터리 생각을 마음대로 내세우고, 
그리고 그런 주장을 자신의 뚝심대로 고집하여  
밀고 나아간다해도 
그래도 괜찮은 것 아닌가. 
이렇게 잘못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mun님이 제시한 이런 내용은 
자칫 그런 생각을 암암리에
사람들에게 잘못 심어 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위 상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위와 같은 상태에서는 
그런 분별들 일체가  
참이라고 단정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그렇게 무모하게 계속 나아가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그렇게 중지하지 않고 
그 분별을 참이라고 할 증거를 얻어낼 수 없는데도 
마치 참인 것처럼 
무조건 그렇게 그 내용을 내세우고
그대로 그런 주장을 감각현실에도 관통시켜 적용해 나가는 경우 
그런 상태는 망상분별 집착 편집증 상태라고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즉, 앞과 같은 한계성이 
위와 같은 망상분별에 면책을 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이 감각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거나
대응시킬 근거를 얻어낼 수 없고 
그래서 그 내용이 감각현실과 관련하여 참임을 밝힐 수 없는데 
왜 무모하게 그것이 그렇다라고 단정하면서
그 내용을 감각현실에 관통시켜 적용하려는가. 
이런 문제제기인 것이다. 

이 경우 mun 님은 
그 상대는 그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그러면 무엇인가?
이렇게 상대가 반론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일단 관념을 감각현실에서 그대로 못 얻는 것, 
또 얻는 관념엔 감각현실의 내용이 또 들어 있지 않는 것, 
그것이 증거라면 증거다. 
그것은 누구나 간단한 정신 실험을 통해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증거는 또 필요없는 것이다. 


한편, 
이런 방식은 실재와 감각현실 
실재와 관념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실재도 사정이 앞과 비슷하다. 
실재는 어떤 내용을 얻어내지 못하기에 공하다라고 표현한다. 
이 공하다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그것이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다고 제시할 도리도 없다. 

그래서 결국 상황이 비슷하게 된다. 

사정이 이러한데 
어떤 이가 이 실재에 대해 '그것은 B다' 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이에 대해 이를 비판하는 이는 
그렇게 볼 증거가 무엇인가 제출하라고 요구한다. 

당연히 그 주장자는 증거를 제출할 수 없다. 
다만 간접적으로 그렇게 생각해야 만 할 어떤 당위적인 요구나 
심정적이고 정서적인 느낌만 장황하게 나열하게 되는 것이다. 

그 주장을 경청하면 때로는 실재에 그런 내용이 반드시 있어야만 

마땅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게도 된다. 

그러나 정작 그 내용은 아무도 얻어오지 못하여
그런 주장이 참임을 단정할 수는 없는 모호한 상태에 

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변적 형이상학자들이 제시하는 주장들의 공통 특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자체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모순점을 찾아내 비판을 계속하면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결국 mun 님과 같은 반론을 제기하게 된다.

즉, 당신이 이를 거짓이라고 주장한다면,
이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를 실재에서 가지고 오라. 
그러면 그 주장을 폐기하겠다. 
이런 식이다. 

참임을 단정할 수도 없고 
거짓임을 단정할 수도 없는 사정에서 
엉터리 주장을 끝없이 고집하고 나아가는 이들이 
자주 비판자에게 행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이렇게 보아야 한다. 

자신이 그것을 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면, 
무엇무엇을 참이라고 진술하면 안 된다. 
최소한 이런 요구는 진리를 존중하는 이들 서로간에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용수보살이 당시 이와 비슷한 형태로
억어지 주장을 제시한 이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밝히지만, 

그러나 그 잘못은
그 당사자 주장과 입장에서 자체적으로
파생되어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뿐이며, 

그렇다고 해서 이런 비판을 통해 
용수보살 자신은 실재에 대해 
그것이 그렇다거나 그렇지 않다라거나 어느 쪽으로도 

어떤 내용을 단정하는 입장은 아니라고 밝히게 된다. 

그런데 실재의 공함에 대해 논의하면서 
실재가 어떠어떠하다고 내세우는 이들을 비판할 때 
이처럼 매우 복잡한 형태로
상대를 비판하게 되는 것도 
그 사정이 이와 유사하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부처님은 이런 입장에서 

감각현실에 대해 관념을 관통시켜 이해하거나, 
실재에 대해 관념을 관통시켜 이해하는 것
또 실재에 대해 감각현실의 내용을 관통시켜 이해하는 것 

또 이런 관념, 감각현실, 실재 내용들이
영원불변한 실체를 갖는 

진짜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임을 제시하시는 것이다 .

그러나 한편,
그런 가운데 실재나 감각현실 그리고 관념이 
각 주체의 정신에서 나타나는 것
그것을 또 모두 없다고 부정해야 하는 것은 또 아니다. 

그런 가운데 이들 내용은
곧 다른 영역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들은 또 서로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님을 관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이런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이것을 넘어서 
어느 내용을 얻었다고
그 내용이 다른 영역(실재, 감각현실)에도 그대로 있다고 고집하고 
그런 내용을 모두 실답게 여기고
집착을 일으키고 행동해 나가면 
그것을 그 부분부터
전도 망상 집착 편집증세 환자의 상태라고 
진단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방식 사이의 경계선에서
함부로 넘어 나아가면 곤란하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이제 수행자는
중생의 망상분별과 집착, 고통증세를 해결하고
성불을 성취하기 위해 

현실에서 요구되는 마땅한 수행방안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리고 수행방안에서는 
물론 그것은 mun 님과 같이
일일히 파리와 신체접촉을 통해
직접 각기 자신에게 내장된 보리를 꺼내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좌도밀교적인 방안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전에 누가 봐도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 
그런 표준적이고 원칙적인 수행 방안부터 
훈련하고 밟아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게 된다. 

보시-정계-안인-정진-정려-반야-방편-원-력-지 
그런 내용이 그것이다. 

선배 수행자들이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순서도 되도록 위와 같은 순서를 따라 
제시하게 된 데에는 
순서를 어겨서 주장한 doctr 님 같은 경우 
봉착하게 되는 문제를 다시 시정해야 했던 
아픔과 곤란한 사정이 다시 이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원점에서 문제되는 첫 논의 
2 + 2 = 5 라는 명제와 관련하여 
즉, 2 라는 모습을 보고 과연 2 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
망상분별인가 아닌가 하는 점을 검토하기로 하자. 


여기에는 군인과 군대의 비유
나무와 숲의 비유가 많이 이용된다고 본다.

경전에서 구름 덩어리를 놓고 설하거나
그림자를 놓고 설하는 내용도 
이와 같은 내용이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어떤 내용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설법을 하실 때 
자주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처럼, 어떤 문제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꼭 복잡한 논의를 통해서 알아들으려 하지 말고 
쉬운 비유를 통해 결론을 빨리 알아듣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사실 더 중요하다고 본다. 

위 군대나 숲의 비유는 이런 내용이다. 

예를 들어 군인이 여러 명 있는데 
어떤 이가 이 군인들을 한번 훑어보고 
'군대가 강해 보인다' 
이렇게 표현한다고 하자. 

나무와 숲의 비유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가 숲에 들어가서 여기저기 한 번 훑어보고 
'숲이 참 공기가 좋다' 
이렇게 표현해버리는 것이다. 

이 명제가 바로 감각현실과 망상분별의 문제가 된다 .

우리는 여기서 개별적인 군인과
개별적인 나무가 이런 진술과 관련하여 제기할 항변 내용을 
당연히 예상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것이다 .

당신이 군대라고 보는 부분, 
또는 숲이라고 보는 부분에 

내가 독립해 활동하고 있고 
또 개별 나무나 풀들이 다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떡하려고 그런 무식한 분별을
이 부분에 대해 그렇게 행하는가. 

이런 문제제기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앞 주장이 맞다고 하면 뒤 주장이 이상해지고 
뒤 주장이 맞다고 하면 앞 주장이 이상해진다. 
그러나 관념이나 판단이
하나의 감각현실에 대해 이것저것 다 된다고 하면 
이제 괜찮은가. 

그래서 다른 망상환자들의 망상을 널리 허용하고 긍정하는 
열린 마음의 망상환자들은 
치료가 필요없는가. 

그렇지 않다. 

사실 위 비유는 비유인 것이다. 

나무를 나무라고 보는 이나, 
자신은 나라고 보는 이의 경우에도
앞과 같은 문제를 다 갖게 된다. 

즉 이 경우에도 
수많은 군인을 대하고 이를 하나의 군대라고 관념하거나, 
수많은 나무나 풀 자갈 모래를 다 함께 대하면서
이들에 대해 숲이란 관념을 갖는 이가 갖게 되는 문제를
이 경우에도 또 갖는 것이다. 

우선 나무란 것도 잘 살피면 
여기에도 가지, 잎, ..... 이런 식으로
각 부분을 나누어 나열할 수 있는 사정이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과학계의 연구결과에 대한 보고를 제시했지만, 
한 사람을 구성하는 세포의 90 %가 다른 미생물체의 세포다. 

그래서 사실은 그런 여러 각기 다른 덩어리들이 
떼 뭉쳐 오는 것을 사람들이 대하면서 
이를 놓고 
어떤 사람(또는 철수)가 여기로 걸어온다.
이렇게 쉽게 분별해 지나치는 것이다. 

이런 망상분별이 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는가. 

그리고 그런 부분을 철수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나서 
그런 철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면서 
공연히 철수 어깨 부분에 있는 수많은 백혈구를 괴롭히기도 하고 
손가락 부분의 엉뚱한 세포들을 괴롭히기도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런 비유의 이야기에서 
망상분별 증세가 스스로 치유가 되지 않고 해결이 안되면 
꽃에서 우주선 기지를 본다는 망상환자와 
일반인의 망상분별이 사실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고 
그런 결과 이들이나 자신이나
기본적으로 망상분별 집착 편집증 환자라는 것을 
스스로 이해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런 경우 누구의 주장이 정말 옳은가를 놓고 
정신 분석 실험실에 가서 엄격한 실험을 진행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 실험이 만나게 되는 한계와
문제점들이 
mun 님이 제시한 것처럼 
제기되는 것이다. 

우선 이런 실험을 위해선 
매순간 정신실험에서 
앞 순간에 실험하는 감각현실과 
뒤 순간에 실험하는 감각현실이 
과연 동일한 감각현실인가 아닌가부터 먼저 해결해야 한다. 

왜냐하면
첫 순간에는 감자모습을 보고 고구마란 생각을 일으키고 
두 번째는 양파모습을 보고 고구마란 생각을 일으킨 다음 
자신이 매번 고구마모습을 대하여 고구마란 생각을 했다고 
엉터리 보고서를 제출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실험과정에서는 무엇이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인가. 

우선 가장 먼저, 매 순간 판단과정에서 
자신이 매 순간 대하는 감각현실이 
전후로 매번 동일한 감각현실이라는 사실부터 먼저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감각현실은 매 순간 얻는 내용만 얻는다는 점에서 
그것이 먼저 해결이 안되는 것이다. 

그것이 해결된다는 이는 
스스로 눈을 감고 
1 분전에 자신이 눈으로 본 감각내용을 
재생해 내 앞 뒤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둘을 놓고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처럼 동일한 감각현실을 매 순간 확보하고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고 
그리고 매순간 이 동일한 감각현실을
자신이 대하여 일정한 관념을 대응시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원천적으로 곤란하다는 것이 
그 정신분석 실험이 봉착한 한계라고
mun 님이 밝힌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만 보면 
어느 쪽으로 단정할 근거를 확보할 수 없다는 
한계사정만 제시한 것이어서, 

자신이 망상환자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그렇지 않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이 일정한 분별을 하고 나서 
그것이 감각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내용이라고 
억어지 주장을 내세우면
그 자체로 망상환자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또 자신이 갖는 관념은 늘 
일정하게 같은 감각현실을 대상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망상환자의 상태가 된다. 

그런데 만일 병원에 있는 망상증 환자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생각하는 내용들이 엉터리 망상분별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하면, 
이 환자를 관찰하던 정신과 의사는 
다음과 같은 진단내용을 추가하게 된다. 

이 환자는 드디어 자신의 병세를 자각하기 시작했다. 
긍정적인 상태다.
퇴원이 멀지 않았다. 
퇴원준비를 이 환자 가족들에게 의뢰해야 하겠다. 


사바세계에서 안인 수행을 열심히 수행해야 하는 
사바세계의 생명들도 사정이 비슷하다. 

이 생명들이 어느 순간 자신이 행해오던 분별이
모두 다 망상분별이었음을 깨닫고
도저히 억울하고 참기 힘든 모욕이나 고통을 만나도 
이에 대해 상을 일으키지 않고 
이를 평안히 참고 견딜 때 
선배 수행자들은 다음 메세지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

이 수행자가 지금 
사바세계의 수행코스를 곧 마칠 것 같다. 뚜. 뚜. 뚜. 
이제 극락세계에 가서 수행자의 여러 방편을 익혀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메세지면 좋지만, 
그 반대면 대단히 곤란하다. 

여기 수행코스로는 안될 것 같다. 
아무래도 아비지옥이 적당할 것 같다. 
지옥문을 열고 대기하라. 두, 두, 

여하튼 사바세계에서 원만히 성취 수행해야 할 내용은 
극락세계에서나 지옥세계에서 원만히 성취수행해야 할 
내용과 다르지 않다. 
다만 교재나 교실 수업도구 등이 조금씩 다른 것 뿐이다. 

앞 논의에 이어서 이 내용을 본다면 
지옥이나 극락이나 이 사바세계나, 그 가운데 인간세계나
다 본래 차별이 없는데 각기 그렇게 
다르다고 분별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노래를 무작위로 올리는 데 
이상한 가수가 부른 노래가 나와 
가사를 검색해보려니 검색에 나오지 않는다. 

Aymeric - Je suis là 란 노래다. 
Aymeric 이가 부른 다른 노래는 
유튜브에 나와
또 이 다른 노래의 가사를 검색하니 
역시 이 가사도 검색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pass 할 도리밖에 없다. 

음악 소리가 좋게 들리고
시감상으로도 무난하다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이와 함께
little 님과 같은 표준 언어이해 감상방식으로도 
모두 무난하지 않으면, 
함부로 노래를 페이지에 올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각 경우
문제가 어느 한쪽에서라도 
발생하면 상당히 곤란하게 된다. 

소리도 좋게 들리고 
시감상으로도 좋게 들리는데 
구글 번역기가 번역해내는 내용은 

예를 들어  
"악마를 따라 마구 사람을 잡아 죽이자. 
자신의 부모거나 형제라도, 
자신의 뜻과 다르고 
자신을 방해하고 나서면 
죽이고 또 죽이자.

더구나 자신의 눈에 
자신의 부모나 형제의 모습으로 생각되지 않으면 
설령 상대가 아무리 자신의
전생의 부모와 형제이고 
후생의 부모와 형제라고 해도 


그리고 상대가 아무리 고통을 호소해도 
사정을 봐주지 말고 
어부가 바다에서 참치를 잡듯, 
도축업자가 도살장에서 소를 잡아 죽이듯 
그렇게 사정을 봐주지 말고 죽여버리자." 

이렇게 명확하게 표준적으로 구글번역기를 통해 
가사가 번역되어 나오면 어떻하겠는가. 


본인이 겉 소리가 좋아 보이고 
시감상으로 그냥 좋아 보여서 
그래서 노래를 그냥 올렸다고 해서 
이 문제가 없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칭기츠칸을 찬양하는 노래를 
곡조가 좋고 흥겹게 들린다고
그런 노래를 페이지에 올려 놓는 것과 
사정이 전혀 다르지 않다. 

몽고사람들은 이 노래를 듣고 좋아하겠지만, 
과거 몽고로 끌려가 학대를 당한 이나 
그 후손은 불쾌함을 느끼고 
본인에게 문제를 제기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본인은
의미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불어 노래를 듣고 
시감상으로 노래를 음미하지만, 
페이지에 올려 놓는 과정에서는 
매번 구글 번역기를 돌려 
일단 대강의 가사 단어를 해석해보고
올리게 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한편, 

수행자가 진여 실재의 측면에서 

본래 모든 상태가 차별이 없고 

모두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관하면서도 


그러나 현실에서는 
세속이 분별하고 집착하는 바를 존중하고 

올바른 수행방안을 찾아 

수행해 나가는 것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즉, 부처님이 제시하는 이런 수행방안은  

분별을 떠난 청정한 진여 실재와  
분별의 현상 차별계 어느쪽에서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원만하게 모두 좋고 좋고 좋은 상태가 

되도록 하는 방안인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경전에서 가르치는 내용도 

바로 이런 내용이다. 


본래 중생을 얻을 수 없고 
보시할 물건을 얻을 수 없고 
나와 나의 것이 본래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다른 이의 물건을 함부로 훔쳐도 되고 
다른 중생을 함부로 괴롭히고 
고통을 주어도 무방하다. 
열심히 괴롭히자. 
이런 내용을 부처님이 제시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본래 중생을 얻을 수 없고 
보시할 물건을 얻을 수 없고 
나와 나의 것이 본래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런 줄 알고 
얻을 것이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보시하고 
중생을 제도하라. 
그렇게 행하지만 제도하는 중생은 
하나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량한 복을 얻는다. 
그러나 그 복에 수행자는 탐착을 일으키지 않고 
수행자는 복덕을 받지 않는다. 

이런 내용이 금강경에 제시되는 내용인 것이다. 



여하튼 조각글을 읽는 과정에서 심심하지 않도록
조각글마다 되도록 노래를 하나 붙여 올리는데 
비록 그 노래는 무작위로 만나게 되는 노래이지만, 

앞과 같은 여러 사정으로 
노래 곡조나 시감상 차원, 그리고 망상분별이지만,
각 언어해석에서 사전적으로 해석되어 나오는 내용등을
여러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한 가운데
큰 문제가 없음이 확인된 후에  
페이지에 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노래 가사가
인터넷에서 검색부터 안되면 

부딪히게 되는 어려움이 많다. 


이런 가운데
내용이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게 되고
또 동시에 이런 생각을 함께 하게 된다. 


부처님이 기본적으로
모든 언어와 분별이 희론이라고 하시면서도 

그렇지만, 그래도,
그렇게 많은 설법을 수행자들을 위해 남겨주신 것은 

수행자에게는 대단한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희론이라고 
정말 아무 말씀도 안해주시고 떠나셨다면, 
얼마나 수행자들이 곤란한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을 것인가. 

이는 일체 희론이라고 검색이 아무 것도 되지 않거나,
정말 엉터리라고 할 내용들만 무한히 검색되어 나오는  
인터넷과 사정이 같아지는 것이다. 


여하튼 가사가 검색이 안 되는 처음 노래는 
이런 사정으로 제외하고 
다시 무작위로 올라 온 노래를 대신 
올리게 된다. 


이 새 노래에서는
L'Aziza 란 소리가 반복해 들리는데 
이 단어가 무슨 의미인가

또 검색하고 확인해보니 정체가 모호하다. 

시감상방법이 유용한 경우는 이런 경우다. 

시감상 방식으로 이 단어를 음미해볼 때 
이런 의미를 떠올리게 된다. 

즉, 
나에 대해서 무아임을 깨닫고
다른 모든 아름다운 이들이 이 내용을 함께 깨닫게 하여 
모두 아름다운 우리가 되어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것을 
라지자라고 할 수 있다 .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이런 해석이 가능한가? 

이는 본래 차별이 없고 분별을 떠나는 공한 진여 실재를
무분별 반야 바라밀다를 통해 꿰뚫어 관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또 현실에 대해서는 아름답고 가치있는 망상분별을 찾아나서는 바탕에서 
이런 시감상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본다. 


그런데 little 님이 위키 백과에서 검색을 통해 
다음 내용을 다시 찾아 제시한다. 

...
'L'Aziza' means 'My dear' in Arabic, although all the lyrics are sung in French. In this song, Balavoine pays tribute to his Jewish Moroccan wife Corinne, and denounces racism. In France, "L'Aziza" became a standard song throughout the years.
...
fr http://en.wikipedia.org/wiki/L'Aziza


이런 정보는 때론 본인의 자유로운 시감상과 일치하지 않기도 한다.

어떤 정보는 그래서 일정한 편견을 형성시키는 데 이바지하기도 한다. 
그런데 또 어떤 경우에서 어떤 정보는
본인의 자유로운 시감상을 지지해주기도 한다 .

그냥 시감상차원으로 생각한 내용일 뿐인데, 
어느 해석은 묘하게 본인의 시감상에 부합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도 갖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서로 다 각 영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본래 차별과 분별을 떠난 실재는 
늘 청정한 니르바나다. 


그런데 여하튼 little 님이 제공한 정보를 섭취하니, 
노래 속에서 시아파 수니파 가자지역 이런 단어가 다 들린다. 
망상도 다른 망상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L'Aziza! 








○ [pt op tr] mus0fl--Daniel Balavoine - L'aziza.l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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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jyr4842

◈Mun Tokyun 2015/04/05/일/09:55


♥ 잡담 ♥쓸데없는 일 

논의가 돌고 돌아 원점으로 다시 돌아 온 것 같다. 

꽃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에 대해 꽃이란 생각을 갖는 것이 
건전한 정신 활동인가. 
아니면 망상분별인가
이런 논의로 돌아온 것이다. 

원래 그림을 벌려 놓고 이 가운데 
저것은 무엇 이것은 무엇 이렇게 알아내는 것을 
상식적인 의미로 지혜라고 한다. 

집에서 기르는 개가 사물을 그렇게 분간해 
지시하는 대로 물고 오면 이는 개 가운데 천재 개이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기어다니는 아이가 그렇게 사물을 분별하면 
똑똑한 것이다. 
이렇게 바람직한 현상을 놓고 
부처님은 망상분별 집착 증세가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기도 하다. 

지혜가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온갖 분별을 다 하고 다 한 끝에 
이제 거꾸로 
그런 분별은 망상 분별이므로 
폐기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이 
세상에서 치매 증세를 일으키면서 
사리분별도 못하고 
오가는 것은 또 아니다.

할 일은 하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사회적으로 요청되지만, 
아무도 나서서 잘 하지 않으려는 부분에서 
앞과 같은 자세로 마치 치매환자처럼 
나서서 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사실 수행자는 위와 같은 주장을 하면서도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존중을 받으면서 같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자신의 생명을 보시하여 다른 이를 구제할 일이 있으면 
여기에 나서는 이도 수행자이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팔 다리를 끊어가도 용서해주고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것도 수행자이다. 
금강경에서 수행자에게 강조하는 바는 
결국 이렇게 특수한 부분에 특수한 형태로 치매증세를 일으키면서 
보시와 중생 제도를 해가면서 
열심히 수행해 나가라는 지시를 부처님이 하는 것이기도 하다. 
분명히 보시도 하고 중생제도도 하면서 
마치 치매환자인 것처럼 거기에서 상을 일으키지도 말고 
무엇인가 얻을 것이나 중생이 있는 것이라고 관하지 말라는
주문을 덧붙이시는 것이다. 

여기에 작용하는 근본 원리가 바로 
분별과 집착을 떠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수행자가 
또 분별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분별을 하면서 
위와 같은 자세를 다시 거기에 입히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분별 자체를 일체 중지하면 
부처님이 지시한 사항을 또 원만히 성취해낼 
도리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 경우는 정말 치매환자나 식물형 인간일뿐이다. 

일반 망상분별 환자와는 그러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꽃의 모습을 보면서 꽃이라는 생각을 하는 이는 
사실 매번 꽃의 모습을 대하면서
그렇게 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그 나름 매우 정연하고 일관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그만 유독 그런 것이 아니고
동류집단이 거의 대부분 같이 그렇게 행한다. 

그래서 이는 직관적으로 곧바로 참이라고 알 수 있는 것으로서
여기에 큰 의문을 서로 제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당연히 참이라고 해야 할 이런 현상을 놓고 
왜 그것을 망상분별이라고 보는가. 

그런데 
사실 lab님의 입장에 의하면
매 순간 꽃의 모습을 보면서 꽃이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확립할 방안이 없다. 
매순간 대한다는 꽃의 모습을 
어떤 실험실에서도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문에 대해 실험과정에서
가장 먼저 확보가 필요한 것이 감각현실이다. 

그러나 이 실험과정에서 확보할 수 있는
감각현실은 늘 그 순간 그 주체가 각기 대하는 감각현실로서 
그 내용은 오직 각 주체의 주관 안에서만 확보가 된다. 
그리고 그 감각현실을 얻는 그 순간 뿐이다. 
그리고 정작 이 내용은 다른 이와 공유도 잘 되지 않는다. 
순수하게 개인 주관에 각 순간에만 있는 내용인 것이다. 

이것이 원래 tok 님이 제기한 논의
그리고 모든 망상분별과 관련된 논의의 원점이다. 

그래서 더 이상의 실험이 진행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최면현상 또는 집단 최면현상과 비교해 보아도
그 과정이 같다는 점에서 문제가 제기된다. 

더 나아가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는 
망상증환자의 증세도 사실은 
이와 과정이 같다는 점에서 문제가 제기된다. 

이것을 놓고 아무리 살펴보아도 
답을 얻어내기 힘들다. 

누구도 이 실험의 한계를 벗어날 도리가 없는 것이다 .

이 내용은 그렇다고 
꽃을 꽃으로 보는 것이 반드시 잘못임을 
밝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최면에 걸린 이나, 정시병원의 망상증 환자의 망상분별과 
달리 그런 판단이 옳다는 것을 
밝혀줄 수단을 갖는 것도 아니다. 

안타깝지만, 이 논의는 
이런 원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단을 
찾기 힘들다. 

그래서 이것을 있는 그대로 
안타깝게 직시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왜 2 + 2  라고 써놓고 그 답을 
4 라고 하면 안 된다
아니다. 안된다고 할 수도 없다는 
논의가 계속 있었겠는가. 

바로 위 문제와 관련된 논의인 것이다. 

우리 눈에는 분명 2 라고 쓴 것 같은데 
그것을 놓고 2 라는 생각을 하는 것부터 
그것이 과연 옳은가 잘못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이는 감각현실과 관련하여 그런 관념을 얻는 것이 
옳은가 잘못인가의 논의가 처음 논의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어느 쪽으로도 결론을 내리기 힘든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원점에서 모든 세상의 문제를 보면 
그 모든 세상 문제가 다 이런 기본 문제를 갖고 있고
또 근본적으로는
그렇고 그런 이유로
다 쓸데 없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한마디로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세상일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오죽하면 부처님이 이 망상분별 증세를 치유시키고자 
온갖 설법을 다 하신 다음에 
그 설법 자체를 포함하여 이 모두가 희론이었다. 
부처님 자신은 한 마디로 말씀하신 바가 없다고 
선언하셨겠는가. 

진리에 관해서는 
이런 복잡한 사정이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의 모습이란, 사실 
공한 실재 진여 청정한 니르바나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부질없이 망상분별을 일으켜 스스로 
고난과 고통을 자초해서 
받아 나가는 길인 것이다. 

한 순간만 그런 것이 아니고 
무한한 시간대에 걸쳐서
그렇게 걸어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

이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더 안타까운 일은 
그렇게 걸어갈 바에는 즐겁고 유쾌하게 밝고 건강하게 
걸어가면 좋은데 
조금 지켜보다 보면 
통곡을 하고 울부짖고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 
걸어간다는 점이다. 

수행자 입장에서 보면 
이 현상을 시정시켜 주는 것이 
중생제도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본인도 그런 입장에서 
그렇게 활동하는 수많은 암파리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장착된 보리를 다시 되찾아 주는 일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을 lab 님이 늘 시비를 건다. 
왜 그런가. 
lab 님의 망상분별에서는 
그들과 본인이 모두 비루한 파리로 보이고 
결코 불성을 갖춘 불보살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본인이 각 생명에게 본래 장착된 보리를 스스로 찾아내 
사용하는 방안을 비밀스럽게 일깨워 주는 행위를 
lab  님은 마치 본인이 비루한 행위에
욕심을 일으켜 행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 뿐이다. 

이것이 바로 망상분별 증 환자의 대표적인 망상분별이기도 하다. 
물론 문제로 보아야 할 경우가 있기는 하다. 
중생제도의 목적도 없고 보시의 목적도 없이 
그저 집착해 나서는 경우가 그런 경우다. 

여하튼 이런 것이 모두
분별을 떠나야 할 근본 바탕에서 본다면,
사실은 이 일체가 다 쓸데없는 일이다. 
그러나 수행자는 그것을 또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 바탕에서 앞에 제시한 것처럼 
고통과 비명을 지르는 생명이 어딘가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쓸데 없는 가운데 
이것을 끊임없이 관하고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온갖 쓸데없는 일들을 놓고
그것이 본래 쓸데는 없더라도
계속해서 보라는 주문을 하는 
노래를 올리기로 한다. 
이것이 원점에 돌아와 수행자가 할
기본 수행덕목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모음을 연속해 말해보라고 할 때 
아에이오우 라고 말하는 이도 있고 
아에이우오 라고 말하는 이도 있고, 
아이우에오 라고 말하는 이도 있고 
아이오에우 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여기에도 각기 특성이 있는 것이다.

한국사람은 아에이우오 라고 말해야 하고
일본인은 아이우에오 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고 
이태리사람은 아에이오우 라고 말하고 
이런 법칙이나 통계는 없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아를 먼저 말하게 된다. 

다 나에 대한 망상분별과 집착으로 
이런 의문에 답을 시작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걸려들면 안 된다. 
일체 답을 하지 말고 
남들이 쓸데없는 분별을 일으켜
소리를 내고 답하는 모습을 잘 지켜보아야 한다고 본다. 

혼자서 배를 잡고 굴르는 한이 있더라도 
최면현상과 망상분별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함부로 말해주어서는 안 되고 
모든 현실에서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원점에서 진지하게 수행자가 
현실을 바라보며 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 





○ [pt op tr]  mus0fl--Team BS - Case départ.l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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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wjs4718

◈Lab value 불기2559/04/04/토/13:25


♥ 잡담 ♥나의 정체에 대한 연구 

나의 정체를 찾을 때 
현재의 순간에 자신이 눈을 떠 보는 세상의 모습 가운데 
자신의 부분과 그외의 부분을 구분하는 것도 어럽지만, 
시간을 두고 변해가는 모습을 놓고 
자신을 찾아 나가는 문제도 어렵다. 

우선 엄밀히 볼 때, 
과거의 감각현실을 
현재 순간에 재생해 얻는 것은 곤란하다. 


지금 눈을 감고 방금 전 눈으로 얻었던 감각현실을 
다시 되살려 얻어내려고 해보자. 
이는 뜻처럼 안 된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 미래에 걸쳐
계속 이어져 존재한 하나의 주체(나)를 생각하고
각 순간의 모습을 이런 주체(나)와 관련시켜 생각할 때는 
엄격하게 보아, 
감각현실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관념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사용되는 관념은 
각 순간에서 얻었을 감각현실을 가리키기는 하지만, 
정작 그 관념이 가리키는 감각현실은
이런 비교나 판단에 직접 사용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물론 감각현실은
그것을 얻는 순간 이외의 순간에 
다시 재생해 얻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판단에서 
정작 문제되는 감각현실은 얻지 못한 상태에서 
관념만으로 이런 판단을 진행하는 것이다. 

여하튼 이런 상태에서 
우리의 마음에서는 
분명 우리의 과거에 경험하고 얻었던
감각현실의 내용들이 그처럼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앞에 서술한 사정으로,
감각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일정한 관념적 내용이고 생각일뿐이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에 걸친 어떤 존재나 자신을 생각할 때는 
결국 이런 내용을 가지고 논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엄밀하게 놓고 보면 
이런 관념적 내용이 과거에 있어서나, 
또 지금 당장의 현재에 있어서나, 
그것이 가리키는 '감각현실'과는 정작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가 
먼저 문제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현재 순간에서
감각현실에서 '자신의 부분'과 '자신 이외의 외부 부분'을 구분할 때에도 문제가 되고, 
시간상 과거와 현재에 걸쳐 계속 이어지는 자신의 존재를 찾을 때에도
역시 문제가 된다.   

감각현실과 이들 각 관념이 서로 어떤 근거로
서로 상응되는 내용이라고 해야 하는가 하는 이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런 논의는 사실은 모두
감각현실과의 관계에서는 
그 내용을 주장할 기초가 확립되지 않는 논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식적인 주장과 믿음을 참이라고 그대로 인정하기에는
사실은 그 안에 이런 이론적인 어려움이 모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이런 생각을 기본적으로 망상분별이라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이를 
우리가 어떤 창고에서 찾아야 할 물건을 정하고 
그 물건을 찾아 가는 경우로 놓고 다시 생각해보자. 

창고를 뒤지며 어떤 물건을 찾을 때는
그 물건을 정말 보게 되기 전까지 
찾아야 할 물건에 대한 관념이 먼저 마음에 있게 된다. 

그러다가 어떤 물건을 보게 되면 
그것이 자신이 찾고 있는 그 물건인가 아닌가를
그런 관념을 기준으로 곧바로
'직관적으로' 알게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여하튼 이런 과정에서 모두 
관념이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그런데 역시 이 때도 앞의 문제
즉, 관념과 감각현실과의 관계가 또 다시 
문제된다. 

즉, 그 감각현실과 그 관념을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매번 대응시켜 관련시키는가가 
이 각 경우에 모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이 관계는 너무나
직관적으로 바로 알 수 있고 당연한 것이어서 
그 관계가 참된 관계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부처님은 기본적으로 
이를 전도 망상분별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 경우 그들을 서로 대응시킬 합리적인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이 갖는 관념내용을
각 감각현실에 관통시켜 반복해 관련짓고
더 나아가 실재에까지 이같이 관통시켜 적용하려는 자세를 
바로 전도 망상분별의 상태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이는 일반 망상증 환자가
꽃의 모습안에 우주기지가 있다는 식으로 
망상적으로 분별을 행하는 것과 같은 형태로 
그런 내용이 없는 영역을 향해
그와 같은 내용이 있다고 망상적으로 분별을 일으킨 다음
그 생각을 그렇게 믿는 것 뿐이라고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이런 사정을 그대로 놓고 
이런 관념적 내용을 통해 
과거와 현재에 걸친 일정한 내용을
함께 자신이라고 관념한다고 전제하고, 
논의를 진행하기로 한다. 



이제 이런 경우 미래의 자신은 현재에서 어떻게 찾게 되는가. 

미래에 자신을 찾아나가려고 할 때도 
사실은 앞의 방법을 비슷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놓고 이를 검토해 보자. 

현재 자신이 자신으로 여기는 그런 여러 내용은 
과연 과거 십년전 또는 이십년전 
그 내용을 알수 있었던 것인가. 
그런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사실 지금 이 순간 찾아내는 자신의 모습은 
과거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그런 내용을 가지고 
지금 모습을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만일 과거의 기준을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면, 
지금 순간 자신을 찾아내는 데 실패할 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순간 미래의 자신을 정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문제임을 이를 통해 
생각하게 된다. 

여하튼 과거 - 현재 - 미래에 걸쳐 
자신을 관념하는데에는 기본적으로 
이런 문제들이 제기된다. 

그런 상태에서 관념으로는 
과거와 현재에 걸쳐 일정한 기간 동안
자신이 계속 일정한 형태로 존재해오고
생활을 반복해 왔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바로 little 님이
이런 과정을 통해 
현실에서 같은 모습이 매우 정연한 형태로 
반복되었다고 생각하게 되고  
또 이를 근거로 이런 내용이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 이와는 반대로 
현실의 관념 분별이 기본적으로 모두 망상분별이라고 하는 것은 
위와 같은 생각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고, 
감각현실과 관념 그리고 더 나아가 실재의 영역에서
이들 각 내용을 
일단 서로 분리시키는 것이다 .

이런 사정은 눈으로 본 색을 
귀로 들은 소리의 내용에 관통시켜 적용하면 
곤란하다고 보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러나 little 님의 주장도 현실적으로 
고려할 바가 분명히 있다. 
본인도 현실에서 little 님과 같이
생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엄밀하게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나의 관계를 살피고
이러한 판단이 정말 참인가 아닌가를 논의할 때는 
이런 것이 모두 문제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단 논의과정에서
다른 이를 가지고 문제를 삼기 곤란하므로 
본인이 갖고 있는 사진 자료를 가지고
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최근에 

군밤 파는 모자를 쓴 아저씨를 찍은 사진이다. 

   
아래는 오래된 앨범에 있는 사진이다.



위 6 개의 사진 가운데 하나는 위 사진의 아저씨와 관련이 있다. 

참고로 옆의 인턴에게 어떤 사진이 서로 관련이 있을 것인가를 물으니, 
의외로 맞추지 못한다. 

결국 이런 문제에서
이 사진의 당사자만 이 문제에서 각 사진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서로 관련시키게 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남이 다른 남의 구체적 사정을 자세히 알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이를 각기 자신의 문제라고 놓고
비슷한 상황으로 놓고
이런 문제를 대한다면, 
각기 과거의 자신 모습과 현재의 자신 모습을
서로 잘 연결시켜 놓게 된다.

그리고 과거엔 자신이 그런 모습이었다라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우선 이들 사진은 지금 대하는 감각현실이며,
정말 그 과거의 감각현실은 아니다. 

그래서 여전히 앞에서 제기한 문제는 남게 된다. 

정말 그 과거의 감각현실은 사실은 꺼내올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정말 정말 그것이 문제되면
그런 한계를 만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위에서 지적한 문제점이다. 

그러나 이제 여하튼 이렇게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사진을 통해 관련시켜 이해할 때는 
다음의 문제가 제기된다. 

우선 과거의 어떤 이를 구성하는 요소와 
지금의 어떤 이를 구성하는 요소에서는 
서로 일치하는 내용을 찾아내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들간에 일치하는 내용을 찾는 것은 
사실 일정한 취미생활을 같이 하는 동호회원 간에 일치한 내용을 찾거나, 
동년배 같은 연령층의 사람들 사이에서 일치한 내용을 찾는 것이 
더 쉽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각 주체는 이렇게 서로 일치하는 요소를 찾기 힘든 
두 모습을 하나의 자신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요소가 무엇인가를 
그래서 다시 찾아내야 한다. 

doctr 님에 의해 일찍이 이에 관해 제시된 내용들이 있다. 


상식적으로 
 A와 B의 육체적 정신적 구성요소간의 유사성,
 A와 B의 발생상의 상호 인과관계와 상속성 

(  이는 이들이 A -> 1-> 2 -> 3 -> 4 - > 5 -> 6 -> B .... 이런 식으로 생성되어 왔다는 내용을 의미한다. )
그리고 또  B의 인식 속에 과거 A에 관한 내용에 대한 기억이 

모호하나마 포함되어 있다는 점 등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아주 특수한 경우에는 인정되지 않는다. 기억상실증 등이 그런 경우다. 

여하튼 이런 요소를 이 두 모습을 하나의 주체와 관련시키는 근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요소가 사실 그렇게 명확한 것은 아니다. 
지금 다른 사람의 보고를 읽어 다른 사람의 내용이 자신의 마음에 포함되어 있고
다른 동년배와 지금의 신체 모습이 유사한 정도를 생각해보고 
다른 이웃이 지금 자신의 삶을 발생시키는 관계를 생각해보면 
위 내용이 이들보다 반드시 더 밀접하다고 보기도 힘들다. 

자신이 오늘 돼지고기와 채소로 식사했다면, 
이 돼지고기와 채소가 자신의 육체의 구성요소와 그 유지에 관여한 정도가
앞의 두 내용사이의 관계보다 더 밀접하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이런 유머가 있다. 

처음에는 자신이 아는 아이였다. 
그런데 이 아이가 매일 가래떡만 먹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아는 아이의 모습이 그 안에 있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가래떡만 그 아이가 먹으면서 
점차 그 아이에게는 가래떡의 요소가 더 많이 차지하게 되었다. 
어느날 침대에서 아이가 자고 있을 때 이불을 걷어 보니
그 안에는 큰 가래떡이 하나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아는 아이였다. 
그런데 이 아이가 매일 컴퓨터 게임만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아는 아이의 모습이 그 안에 있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컴퓨터 게임만 그 아이가 열심히 하게 되면서 
점차 그 아이의 마음에는 컴퓨터 게임 내용이 더 많이 차지하게 되었다. 
어느날 침대에서 아이가 자고 있을 때 이불을 걷어 보니 
그 안에는 마인크래프트 게임속의 스티브가 누워 있었다. 


[ 참조 Minecraft-Steve ]

이런 식이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의 육체에는 생선회와 닭살이 가득하고 
마음에는 그 마음을 지배하는 욕심과 분노가 가득 차 있는 경우가 많다. 
자고 있는 상태에서 이불을 걷어보면
무슨 모습을 그 안에서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될 것인가. 
궁금해지게 된다. 


○ 이 경우 두번째 의문이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저 사진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들이 이 사진을 보는 경우와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에는 수많은 생명이 각기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사람은 이런 모습으로 이렇게 살고 
저 곤충은 저런 모습으로 저렇게 살고...
이렇게 한없이 나열해 보게 된다.

그런데 위 사진의 주인공은
저 두 사진을 이어서 상당히 긴 시간 동안의 이력을
잠깐씩 떠올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자신이 자신의 과거를 회고해 본다면, 
매우 이상하고 이상한 경로를 따라
지금의 순간에 이르게 되었음을 생각해내게 된다. 

물론 각 주체에 따라 그 구체적 사정은 다르지만,
이런 측면은 다 엇비슷하다. 

제 각기 그런 내용을 익숙하게 여기지만,
또 한편 수많은 다른 생명의 삶의 경로와 비교한다면, 
이는 그 자신에게만 독특한 내용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인가. 

각 주체는 이번 생을 살면서부터 경험한 내용을  
나름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지만, 
그러나 수많은 생명들의 각기 다른 독특한 내용과 비교할 때는 
왜 자신이 하필이면 그런 독특한 내용으로 살게 되었는가를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경우 그저 그 모든 내용을 우연한 요소들의 결합이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 한편 자신은
태어나서 생활한 이후 지금의 순간까지 
일정기간 이처럼 독특한 자신이 계속 존재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도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
또 그렇다면, 태어나기 이전에는 자신은 어떤 내용과 이어주어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불교의 윤회관은 자신이 이번 생에 태어나기 이전에도 
그처럼 자신의 주체를 이어서 생각해야 할 내용이 있었다는 것이고 

윤회를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단지 자신의 육체가 생성된 이후부터 
그런 내용이 시작되었고 
육체가 소멸되면 또 그것으로 끝을 맺고
더 이어줄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기본적으로 보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이 가운데 어느 입장이 맞는가가 
또 나의 정체를 밝히는 문제와 깊이 관계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앞으로 

삶을 계획하고 추구해나가는 데에도 
역시 중요하다. 

논점을 대략 나열했지만, 
하나같이 명확한 답을 얻기 힘들다. 

그런데 현실에서 상식적으로 나 자신을 생각할 때 
이런 내용들이 모두 문제가 된다. 

불교의 무아설은 기본적으로 
이런 여러 생각이 사실은 엉터리라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엉터리인데 엉터리라고 보지 못하고 
앞과 같이 생각하고 이를 하나의 주체로 연결지으면 
그런 연결을 바탕으로 앞 뒤로 무한하게 
연결시킬 내용이 또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윤회는 그렇게 있는 것이고 
생과 사, 즉 태어남과 죽음도 우리가 보는 내용처럼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이 순간 감각현실과 관념을 분리시키고 
더 나아가 실재와 이들을 분리시키면, 
그런 내용은 오직 망상분별속에서 고집하고 집착하는 
내용들에 불과함을 보게 된다 .


사실 이런 서로 다른 입장은 각 입장에서 보면 
각기 상대가 매우 이상한 주장을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두 주장을 살펴 봐도 
각 주장에 조금씩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니 이런 논점을 놓고
자신의 정체가 정말 무엇인가에 대해 
좀 더 깊이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다만, 현실적으로 중요한 점은 다음이라고 본다.  

만일 어떤 이가 늙어가는 자신이 싫어
특정한 순간의 과거의 모습만을 고정시켜
자신의 진짜 모습이라 정하여 놓고
그것을 자신의 진짜 모습이라고 고집하고 
그 모습을 그대로 지금도 얻고 나중에도 유지해야 하고 얻어내야 한다고 하면, 

곧 상당히 불쾌한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뜻처럼 잘 얻어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안타깝게 여겨도 지나간 시간은 
지나가버려서 그대로 현재에 재생할 수가 없다. 

과거의 10 년전 20 년전 모습도 사정이 사실은 그와 같은 것이다. 
그 모습을 지금 얻어내려고 고집하면 
그것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리고 미래의 죽음도 그런 사건의 하나로 생각할 수 있다. 
죽은 사람을 살려서 그 이전에 살아서 활동하던 모습을 얻어내려고 고집하면 
그것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것은 모두 사실은 같은 문제다. 


그래서 이런 변화의 연장선에서 
이 모든 변화하는 모습에 
진짜의 나는 없음을 생각하고 
이 모든 변화하는 각 모습에 큰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과거의 모습과 지금 모습은 서로 대단히 많이 다르고, 
엄밀하게 그 둘이 다 같은 하나의 나라고 생각할 근거가 없기에 
이 두 모습들이 다 하나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 엉터리 생각이기는 하지만, 

일단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과거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다 같은 자신의 모습이라고 받아들여 주어야 한다. 

불교 입장에서 보면
세간 사람들의 이런 망상분별에
동조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는 이런 나라는 존재는 
그 모습이 변하고 무너져가고 
또 새로 나타나는 가운데
앞 뒤로 계속 이어져서 
그 각 모습을 옮겨 타면서 변화해가는 그 주체를 
모두 다 나라고 받아들여주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입장에서 또
진짜의 나는 없지만,

윤회를 통해 변화해가는 자신은 
또 그렇게 무한히 삶을 이어가며 변화해감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일단 이런 가설을 놓고 
계속 검토해 나가기로 한다.

지금 올리는 노래는 
무작위로 올리게 되는 노래인데, 
그래도 글 내용과 무언가 관련이 되는 노래라고 생각된다. 

노래에서 오래간만에 서로를 만나 보는 가운데 
끝 부분( 3: 33 ) 에서 
'무아'를 힘주어 강조해 외치는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감상에서 중요한 초점이라고 본다. 







○ [pt op tr] 가사 mus0fl--Patrick Bruel - Place Des Grand Hommes.l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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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gfl--2015-04월_댓글보전.txt ☞◆vwjs4718
 







◆myki3523
◈Mun Tokyun 2015/04/04/토/09:45


♥ 잡담 ♥뗏목과 경전 

lab 님이 본인이 여러 외국어에 능통한 것을 알고 
본인을 경전번역연구소 상임위원으로 활동할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본인은 생각이 다르다. 

보리란 늘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어서
늘 생활에서 사용해야 하는 것이고  
특정한 경전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면 안된다. 

그렇다고 경전을 가볍게 대할 것은 아니지만, 
경전이 소중하다고 경전에 달라 붙어 있어서도 곤란하다고 본다. 

경전의 번역이 필요하다면, 
그 번역의 필요성을 느낀 누군가가 
힘써 경전번역에 필요한 언어를 배워서 
번역해 가져갈 일이라고 본다.  

비전문가가 한 두 문장씩 번역해서 
이뤄지기 힘든 일이라고 본다. 

영미권에도 당나라때 현장 스님과 같은 분이 
나타나야 하리라 본다. 
lab님이 다음 생에 한 번 도전해 보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러려면 영미권 사람들이 볼 때 
경전을 사용한 이가 
경전을 사용하지 않는 이보다 
훨씬 더 좋은 상태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들이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들이 그것을 보고 그 가치를 깨닫게 되면, 
굳이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이 경전을 가져가기 바쁠 것이다. 

그러나 또 사정이 반대라면 
아무리 강제로 경전을 안기고 
매일 읽으라고 한다해도 
한 줄도 읽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오히려 
lab님이 경전을 읽고 이를 통해
그 효용을 마음껏 
얻어내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본인이 읽는 중아함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훌륭하고 훌륭하다. 

만일 너희들이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아
이른바 '나의 이 소견은 이렇게 청정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을 아끼지 않으며, 

그것을 지키지 않고 그것을 버리려고 한다면, 


너희들은
내가 긴 세월 동안에 설한
뗏목의 비유를 알고, 

그것을 안 뒤에
막힌 것이 트이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 
fr 아리타경 제9 k0648sf-- ☞뗏목의 비유를 알고


그러나 또 경전을 뗏목처럼 여기란 말은 
경전 가르침을 일단 사용하고 나서, 
필요없게 되면 아무렇게나 
버리고 떠나라는
그런 의미는 아니다. 


현재 논의중인 무아설과 관련하여서는 
경전에 다음 내용이 나온다 .

...

만일 어떤 비구가
'안(眼-눈)은 나[我]요, 

내게는 안(眼)이 있다.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도 또한 그러하며, 

의(意)는 나요, 

내게는 의(意)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 비구는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니, 

마치 저 상인이 나찰귀신에게 먹히는 것과 같다. 


이것은 내 법을 잘 설하되
지극히 자세하게 모두 드러내 밝히고
잘 보호하여 없어지지 않게 하며, 

마치 물 위에 뜬 뗏목처럼
널리 유포해서
마침내 천인에 이르기까지 미치게 하고자 함이니라. 


그러니 이와 같이 내 법을 잘 설하되
지극히 자세하게 모두 드러내 밝히고  

잘 보호하여 없어지지 않게 하며, 

마치 물 위에 뜬 뗏목처럼
널리 유포해서
마침내 천인에 이르기까지 미치게 하여라.

...

fr 상인구재경 제9 k0648sf-- ☞물 위에 뜬 뗏목처럼 

결국 
부처님이 경전을 뗏목의 비유로서 가르치시는 
본 취지는 다음과 같다.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이 뗏목은 네게 이익이 많았다. 

나는 이 뗏목을 타고서야
안전하게 저쪽 언덕에서
이쪽 언덕으로 건너올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이것을
오른 쪽 어깨에 메거나
혹은 머리에 이고 가리라.'  


그래서 그는 곧 이 뗏목을
오른 쪽 어깨에 메거나 혹은 머리에 이고 간다면
비구들아, 

너희들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그 뗏목에게 어떤 이익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모든 비구들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해야
그 뗏목을 위해 유익한 일이 되겠는가? 


그 사람이 만일

'이 뗏목은 내게 많은 이익을 주었다. 

나는 이것을 타고서야
안전하게 저쪽 언덕에서
이쪽 언덕으로 건너올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이 뗏목을
도로 물에 두거나
혹은 언덕 가에 버리고 갈까?' 하고 생각하고는
그가 곧 이 뗏목을 도로 물에 두거나
혹은 언덕 가에 버리고 간다면
비구들아, 

너희들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이
그 뗏목을 위해 유익한 일이 되겠느냐?"

 

모든 비구들이 대답하였다. 


"유익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긴 세월 동안 뗏목의 비유법으로 설명하여
그것을 버리게 하고
그것을 받지 않게 하려 했다. 


만일 너희들이
내가 긴 세월 동안 설한
뗏목의 비유에 대해 잘 안다면 

너희들은 마땅히 이 법도 버려야하겠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겠는가? 

...

fr  아리타경 제 9 k0648sf-- ☞마땅히 이 법도 버려야하겠거늘 


결국 자신이 구체적으로 
경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는 
그 상황마다 각기 그 의미가 다르다고 본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그것을 판단해야 한다고 본다. 



본인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법도 버려야하겠거늘 
하물며 lab님의 사견을 
버리지 아니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해보게 된다. 




○ [pt op tr] mus0fl--Daniel Balavoine - Les Petits Lolos.l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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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gfl--2015-04월_댓글보전.txt ☞◆myki3523
 



◆vzyv5460

◈Lab value 불기2559/04/04/토/01:10


♥ 잡담 ♥경전번역사업의 모델







웹툰과 코믹 사이트들이다. 
한국 웹툰작가들이 미국과 일본에 진출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림이 보는 입장에서는 쉬어 보이지만, 
그리는 입장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왜 웹툰이 인기가 있는가. 
그렇게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무언가를 없애지말라고 자꾸 소리치는 듯한 노래를
들어보기로 한다. 








○ [pt op tr] mus0fl--Black M - On s'fait du mal.l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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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xrq5292

◈Lab value 불기2559/04/03/금/19:00


♥ 잡담 ♥경전번역사업과 가치

경전을 번역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평생 경전 안의 한 문장을 번역할 수 있을 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방향을 정하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한 문장은 번역한다. 이런 각오로 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만일 정말 번역을 잘 한다면, 
그 경전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까지 대략 2559년 동안의 추세로 보면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을 떠나, 대단히 가치있는 사업이라고 보게 된다. 

연구를 하는 가운데
어떤 문제에 대해 참거짓이 긴가 민가 오락가락할 때 
경전에서 그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게 되면 
확신을 얻게 된다. 
그렇다. 이것이 옳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경전의 힘이란 수행자에게 그런 힘을 주는 것이라고 본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얼마나 외로웠을 것인가. 

세상이 뒤바뀐 상태에서 
거꾸로 자신이 뒤바뀐 것으로 취급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시정해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기도 한 것이다. 

아래에 올린 노래 가사를 보다가 
time is priceless 이란 문장 안에서 
priceless 란 단어를 보았다. 

번역사업을 하려면 영어단어부터 잘 음미해야 한다고 보기에 
단어의 뜻을 음미해본다. 

가격을 나타내는 price 와 - 이 없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less 가 
합쳐진 단어로서 
가격이 없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말이 가치가 형편없다는 의미일까. 

이 말을 잘못해서 '가격이 없는' 이렇게 번역하면
정말 가치가 없어서 
가격이 없는 것으로 사람들이 오해하기 쉽다. 

번역가의 올바른 번역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라고 본다. 

그런데 현실에서도 가격과 가치의 관계에 대해서는
위 내용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아
가격이 없는 것들은 
가격이 없기에 가치도 없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대단히 많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인데 
너무 흔한 현상이어서 오히려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쉽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세상에서 가격이 매겨지고 가격표에 숫자를 기재할 수 있고
그래서 가격표에 숫자가 적히는 것들은 
무엇이 정말 가치가 있는가를 놓고 따지는 가치 저울 위에서는
사실은 대부분 상대적으로 낮은 가치를 갖는 것들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 것들에 한해
시장에서 거래되고
가격이 숫자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격표가 매겨지는 것들이 갖는 가치란,
정말 가치있는 것들에 비하면 대단히 가치가 낮은 것이어서 
되도록 이런 것들에는 관심을 갖지 말고 
정말 가치가 있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 가치를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즉 정말 가치있는 것들과 비교한다면,
그처럼 가격이 매겨져 평가되는 것들은
모두 버려진 껌에 붙어 있는 먼지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가치 차이는 현실에서는 이런 의미를 주는 것이다. 

정말 그것이 문제되고 필요한 경우에  
가격표가 매겨지는 것은 
돈을 가지고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가치가 있는 것들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200 층짜리 빌딩과 
심장이나 생명을 놓고 생각해보자. 

둘다 현실에서 필요하다고 할 때, 
200 층짜리 빌딩을 사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
그렇다해도 그것은 돈이 있으면 얻을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조금 사정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정말 가치있는가를 따질 때는 
가치저울의 한쪽에 두 눈이나 심장, 또는 생명을 추로 올려 놓고 
최소한 그것보다는 더 가치가 있는 것을 
문제삼아야 한다고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것에 비해 가치가 적은 것들에 대해서는 
앞의 표현처럼
옷에 붙은 티끌이나 껌에 붙어 있는 먼지처럼 관하여
그런 것들이 되도록 마음에 번뇌와 집착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고 
이런 내용을 마음에 남겨 두지 말고
빨리 지워 없애버려야 한다고 제시하게 된다. 

이는 이들이 전혀 가치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함은 아니다. 
씹다 버려진 껌도
오늘 책장안에서 판자를 고정시키는 데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현실에서 가격이 매겨지는 물건이나
일이나 사업이나 
모두 그 나름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가치 저울 위에서 이들과 다른 더 높은 가치를 놓고 비교하게 되면
다른 것이 갖는 가치가 대단히 높아서
이런 물건들이 그런 것들과 갖는 
가치의 차이를 산수나 언어로 잘 표현할 수 없게 되기에 
그와 같이 표현해서 대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경우다. 
가치 저울 한쪽에 자신의 생명, 목숨을 올려 놓고 
다른 쪽에 우주 전체를 놓고 
이 가운데 하나만을 취해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어느 쪽이 더 가치가 있다고 보는가. 

그리고 이제 문제되는 가격표가 붙여진 물건이나 일을 놓고 
다시 이들 간의 가치 차이를 계산해보자. 

우주가 갖는 가치를 1 이라고 표현한다면, 
이제 문제되는 것이 갖는 그런 물건이 갖는 가치는 
0.00000000000000000........  1 이런 식으로 표현하게 되고 
또는 언어로는 티끌의 티끌 이런 식으로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반대로
숫자로 표시되어 붙여지는 이런 가격표와 그 가격 숫자에 압도되어 
그렇게 대하지 못하게 된다. 

람보 자동차가 다른 차와 살짝 부딪혀 앞 범퍼가 부서졌다. 
그런데 그 수리비가 당신 월급 200 만원의 100 배가 나왔다. 
이런 식으로 비교를 하면 
순간 충격을 받게 된다. 

이런 현실 사정으로 인해
이런 가격으로 표시되는 가치에 
대단히 집착한 가운데  
사실상 이런 가치를 얻기 위해 
가격표가 적혀 있지 않지만
그보다 훨씬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대단히 높은 것을 희생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건 사고 기사의 내용은 이런 현실과 
관련된다. 

그러니 반대로 가격표는 붙어 있지 않지만,
가치가 이처럼 대단히 높은 것을 기준으로 놓고 
이런 것들이 사실은 
껌에 붙어 있는 먼지처럼 가치가 대단히 상대적으로 적은 것임을 
관해야 한다고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priceless 는 가격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고
한국말로는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가격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가치가 매우 높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비슷한 말로 
invaluable 이란 표현이 있다. 

valuable 이 가치평가를 해서 가치가 있다고 보는 상태라면 
너무 가치가 높아 오히려 그런 가치 평가 작업이 불가능한 상태임을
앞의 접두어 in- 이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결국 이는 앞의 priceless 와 비슷한 표현이 된다 .
즉, 이는 헤아릴 수 없고 평가할 수 없을 만큼
매우 가치가 높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priceless 와 
invaluable 두 표현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가치가 높은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일까.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둘다 숫자로 가격을 표시할 수 없고, 
관념이나 가치 평가를 할 수 없어서, 
그런 평가작업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가치가 높은 상태임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돈 아래의 가치와 돈 위의 가치를 나눈 바 있는데 
삶에서 추구할 것은 
돈과 돈 아래의 가치를 가지고 
돈 위의 가치를 잘 수확하는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와 반대의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된다 .

훨씬 가치가 높은 돈 위의 가치를 희생시키면서 
고작 돈이나 돈 아래의 가치만 있는 것을 
얻어 갖는 경우가 대단히 많은 것이다. 


어떤 경우에 그렇게 되는가. 

자신의 눈과 마음의 초점을 
화폐액수에 맟추고 
세상의 모든 것을 
이 기준에 최종적으로 끌고 와 
계산하며 대할 때이다.

그것이 중요한 것인가?  
그것은 얼마지?  
가격이 없다고?
그럼 가치도 없네, 
이렇게 생각하고
바삐 외면하고
회계장부에 기재할 수 있는 것에만 시선을 맞추며 
떠나가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우
정작 그들은  
그 돈으로 최종적으로 무엇을 바꾸어 갖는 것인가를 
잘 생각해야 한다.  

이 퀴즈를 잘 풀지 못하기에 
사람들이 대단히 지혜가 있고 계산을 잘하는 것 같으면서도 
스스로 얕은 꾀에 빠져 
엄청난 고통을 받고 살아가는 것으로 보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매 생활현장에서
가격표를 떼고 생각하는 자세 
그리고 
가치저울에서 기준 추로 사용하게 되는 두 눈이나 생명이 갖는 가치보다
더 가치있는 것들에 마음의 초점을 맞추고 

price- less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보게 된다. 






○ [pt op tr] mus0fl--Emilie Jolie - Lara Fabian - Philippe Chatel - Chanson d'Emilie Jolie Et Du Grand Oiseau.l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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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gfl--2015-04월_댓글보전.txt ☞◆vxrq5292
 





◆vjht3115
◈Lab value 불기2559/04/03/금/14:33


●경전번역연구소 설립 축하 


doctr 님에 의해 준비된 기금으로
새로 무슨 사업을 할 것인가를 
그동안 고민하였다. 

최근 대략 10 년간 진행해온 사업이 완료되었고
이제 새로 회향을 해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즉 새 목표를 설정하여 turn을 해야 하는데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은가 
이것이 고민이 된다. 
물론 크게 보면 중생제도 성불 이렇게 압축할 수 있지만, 
그 구체적인 방안을 찾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 기획된 사업 예를 들어 
오프라인 강의를 하는 대학교를 운영할 것인가. 
아니면 동영상 강의를 하는 사이벗 대학을 운영할 것인가. 
이런 것도 고려대상이지만, 

최종적으로는 경전번역연구소를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경전과 관련하여서는 
최근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았다. 
통도사 '16만 도자대장경' 20년만에 완성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5371253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77794

2011 년도에 도자기로 해인사 고려대장경을 전부 만들어
보관하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한 스님이 20 년간 노력으로 그런 사업을 성취했다는 소식이다. 

4 년전 소식인데 지금 알게 된 것이다. 

[ ceramic tripitaka-made-of-ceramics] 통도사 도자 대장경 모습


이로써 
대장경을 원형 그대로 아름답게 
오래오래 보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보고
한 스님이 서원을 세우고
이런 어려운 사업을 성취해내는 힘에 놀라게 된다. 

결국 연구원들도 
이런 자세를 본받아 
아름답고 가치있는 서원을 세우고 
성취해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경전을 놓고 생각하면, 
cbeta와 고려대장경연구소를 통해서 
세계적으로 한문 대장경 텍스트 전산화작업은 완료되어서 
인터넷이나 컴퓨터를 통해 쉽게 검색해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대장경 원본을 대할 때 
생각하게 되는 문제점이 있다. 

이 대장경의 문장의 의미가 정확히 무슨 의미인가 
이 부분에서는 자주 막히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도 한국은
한문 대장경도 있고 
또 한글대장경도 기본적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래서 마음을 일으켜 가지면
이를 통해 쉽게 연구가 가능하다. 

그런데 시야를 넓혀 보면 
세상에는 한국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다. 

아시아 여러 국가나 유럽, 남북미주 대륙, 오세아니아 대륙 그리고 아프리카 지역을
놓고 볼 때 이들 지역에서 
불교 경전을 대하여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고 본다. 

그것은 경전의 번역이
이들 지역에서는 아직 잘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래서 경전을 기본적으로
우선 세계 공용어인 영어로 번역해 
인터넷을 통해 공개하는 사업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는 영어가 오늘날 표준적인 세계 공용어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어 번역을 우선 하고,
그다음 각국의 언어로 번역해 나가면 되리라 본다. 

그래서 이런 사업을 위해 경전번역연구소를 
설립하는 것이다. 

상임연구원은 연구소에 늘 근무하고 
경전 번역작업 자체는
범어 티벳어 한문 중국어 영어에
다 함께 능숙한 분을 
세계적으로 발굴해서 
이 분에게 경전 텍스트 번역 도급을 주어
번역을 완성한 다음 
인터넷에 게시해서 올리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상임연구원은 이것을 총괄 집행하는 것이다. 

현재 연구소 기금이 바닥이므로
당장 비용이 필요한 부분은 착수하기는 힘들지만,
그러나 그외 부분은 곧바로 실행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필요 비용의 준비와 관계없이,
곧바로
경전번역연구소를 설립하고 업무를 시작하기로 한다.

원래 이런 사업과 관련하여서는 doctr 님이 늘 강조한 내용이 있다. 


어떤 꿈을 가질 때 
그 꿈을 가진 순간
그 꿈이 이미 성취된 것처럼 관하고 
그 상태에서 필요하고 해야할 일을 찾아 내고  
그 가운데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 하는 것이 좋다는 내용이다. 

그러다 보면 또 그 꿈이 성취되게 된다고 본다 .

그런 자세로 이미 
대학교와 사이벗 대학 운영 문제들을 
모두 원만히 해결한 바 있다. 

그래서 이제는 번역연구소사업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추진하기로 한다. 

그래서 경전번역연구소를 
지금 즉시 설립한 가운데 운영해 나가기로 하게 된 것이다. 

연구소 기금이 없기에 
지금 당장 경전번역연구소 상임연구원이 되면 

월급으로 2000 원을 지급해준다고 한다. 

거의 무급 봉사에 준한다고 보지만, 
상임연구원인 만큼 상징적인 의미로
두개의 하늘을 제공해주는 
의미로 이천원을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즉, 색계와 무색계의 하늘 => 이천 원이다. 

일단 상임연구원부터 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급받은 2000 원으로 
복권 기금쪽에
연구소 기금 지원을 신청해보기로 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기금마련보다
상임연구원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어학 공부라고 본다. 

한편 경전이 번역이 완료되어도 
또 그 각 부분의 의미를 이해하거나
그 의미를 해설하고 설명하는 문제는 
별개 문제가 된다. 

영어 불교 전문 사전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런 사업도 
결국 경전 번역연구소가 담당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 



새로 듣는 불어 노래인데 

좀 더 빨리 일을 하려면 
투 잡을 하는 것이 좋다고 노래부르는 것 같다. 
음~~
 
노래 동영상을 보니 그간 불어노래 동영상을 통해 본 낯익은 얼굴들이 많이 보인다. 
이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아마 대부분 유명 가수들인 것 같다. 
~~
다시 잘 들어보니 
함께 빨리 성취하는데는 
두 자비가 필요하다고도 하는 것 같다.  
어떤 두 자비?  자비(慈悲) 자비(自費)?



○ [pt op tr] mus0fl--Les Enfoirés - Toute la vie.lrc




문서정보 ori http://story007.tistory.com/1047#3115
10gfl--2015-04월_댓글보전.txt ☞◆vjht3115
 








◆vtcu3366
◈Lab value 불기2559/04/03/금/11:00


♥ 잡담 ♥나의 정체에 대한 오류문제


내가 눈을 떠 보는 모습 가운데 
나와 나 아닌 부분을 구분하는 기준을 살폈다.

이와 관련하여
아함경에 나오는 무아설 내용과 관련된 내용은 
별도 조각글을 통해 대략 살핀 바 있다. 

아함경 경전에서는 

물질(몸)이 아프다면 자신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온다.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어라.나의 물질이 이렇게 되지 말아라라고 
물질에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니다 이런 주장이다. 


이렇게 나의 부분을 정하면, 
내 뜻과 달리 아프고 무너져가는 신체기관은
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아니어서,
나의 부분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무엇을 진짜 나라고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다양한 입장에서 제기될 수 있다고 본다. 
http://thegood007.tistory.com/1184#anatman


그런데 doctr님이 이와 관련하여
오래 전에 제기된 의문을 다시 제기한다.  


자신이 몸을 움직이겠다고 할 때, 
이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부분이 자신이라고 한다면, 
자신이 자신의 몸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에는
잘 생각해 보면,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별개의 뜻에 의해 움직이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대표적으로
자신의 몸을 하나의 세계로 생각하고
이 안에 터를 잡고 바삐 살아가는 미생물들이 많다. 

이들이 제각기 미세하게 쉼없이 움직이고 활동하는데 
이들은 결코 자신의 뜻을 따라
그렇게 움직이고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오래 전에 자신의 몸 세포 가운데 
이런 몸안의 미생물이 자신의 몸의 90 %를 차지하고
있다는 학계 보고를 보고한 적이 있다. 

자신 몸 안의 세포의 90 %가 

자신과는 별개의 미생물들의 것이라는 것이다. 

현대 과학자의 최근 주장이니,
옳고 그름의 문제는 조금 더 기다려 봐야 할 것 같다. 


○ [pt op tr] https://www.sciencenews.org/article/year-review-your-body-mostly-microbes



이런 범위에 넣어야 할 생명체는 
바이러스, 세균도 있지만, 
자신의 몸 안의 암세포도 포함시켜야 할 것 같고 
또 몸안 밖에서 살아가는 기생충 등 작은 벌레들도 넣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유익한 활동을 한다지만, 
과연 백혈구가 내 뜻을 따라 일일히 움직였는가. 
이런 점에서 이들 하나하나를 붙잡고 
넌 과연 누구인가? 네 정체가 무엇인가? 등을  
심각하게 검토해 보아야 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한편, 우리 몸의 기관으로 보지만, 

자신의 통제를 따르지 않고 독립적으로 움직이거나,
여하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고 보여지는 
기관들도 있다. 


예를 들어 심장도 그렇고
생각해보니 귀도 잘 내 마음대로 못 움직인다. 
이런 부분은 또 어떻해야 하는가. 


반대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거나, 자동차를 탈 때는 
이들이 자신의 뜻에 맞추어 잘 움직여 준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내 뜻대로 움직여주는 부분이
반드시 내 몸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고
내 몸 이외로도  
더 확장될 수도 있음을 보게 된다. 

일찍이 외계인이 지구에 도착한 후
거리를 바삐 움직이는 자동차를 보고 
이를 바퀴벌레라고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동차 안에서 사람이 문을 열고 여럿이 내리자, 
바퀴벌레 내장이 터졌다.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래서 이런 현상을 놓고
과연 이 가운데 나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다보면, 
아리송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대충 대충 넘어갈 일은 아니다. 

몸 안에서 정식으로 내 뜻에 따라 활동하지 않는 
부분을 모두 제외하면 
내 몸 90 %는 제외시켜야 한다고 하니,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사실 자신의 뜻대로 되는 세상일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 

그러나 mun님 처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과적으로 모두 자신의 뜻과 다르지 않다고 승인해가며 
임운(任運) 처세관을 닦는 경우는 
또 전 우주가 자신의 뜻과 같이 
움직이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여하튼 이런 여러가지 내용은 
우리가 우리로 보는 부분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관련하여  
많은 논의점이 잠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불어 음악을 듣다보니 라디오 방송에서 
너무 오래된 노래만 반복해 들려 주는 것 같아서
최신곡을 들어 보기 위해 
직접 불어 노래 차트를 찾아 보았다. 


참고 프랑스음악차트 

https://francemusiccharts.wordpress.com/2015/03/

올려진 노래를 보니 정작 불어 노래는 별로 안 되는 것 같다.  
불어로 된 노래만 들어야 할 이유는 별로 없지만, 
조금 아쉽다. 


그 가운데 한 노래를 듣는데 
Sur ma route 란 가사가 자주 나온다. 

이 부분의 소리를 듣고 '질마혹'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 

외국어 난청 현상이 본인에게만 있는 현상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확인해보니 On my way 란 의미라고 한다. 
그런데 On my way 에 대해서는 
앞에서 본 외계인 자동차 바퀴벌레 착오 사건과
비슷한 문제가 여기에도 있게 된다. 


자신은 자신의 길이라고
세상 여기저기를 다니고 바삐 일을 했는데, 
정작 우리 몸에 탄 다른 생명체들은
이런 자신을 
마치 각기 자신의 자동차 정도로 생각하고
자신의 몸에 올라 타고
그렇게 다닐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 몸이 시체가 되는 순간에도 
타고 다니던 자동차가 폐차되는 정도로만 여기고 
이와 별 관계없이 살아갈 미생물들도 있는 것이다. 

기생충들이 별로 생각없이 살아가는 것 같지만, 
각 생명체의 몸 안과 밖을 오가면서 
일생을 살아가는 것을 생각하면 
진짜 이 몸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이런 의문이 생긴다. 

배경그림으로 나오는 우주선들을 보니 그런 생각이 더 든다. 

아이들의 경우도 조금 사정이 비슷하다. 

어떤 때는 말을 잘 들어서 
거의 자신의 분신이 아닐까 생각하고 대하지만, 
어떤 때는 사사건건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고 말을 들어주지 않아, 
이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외계 손님들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빚을 받기 위해 나타난 내 채권자들인가. 

아니면 나를 붙잡아 일을 시키기 위해
나타난 주인들인가. 
이렇게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사실 자신의 삶만 놓고 신경써도 살아가기 바쁜 상황에 
이런 주변 문제까지 신경 쓸 일이 아니고 
자신의 일만 잘 하면서 살면 된다고 보지만, 
그러나 학문적으로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 아닌가. 

그런 입장에서 
자신이 어떤 다른 이를 만난다면, 
상대방 몸안의 미생물의 상태도 일일히 확인 점검을 
하는 것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그 상대방도 사실 자신 뜻대로만 
살아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을 놓고 보면 
노래를 놓고 시감상할 여유가 없다. 

노래에서 우선 다음 가사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전체 노래를 음미해보는 중이다. 

On my way so I can not count the worries what so crazy

A life of roots

can not count 라고 하니, 
걱정이 전혀 없어서 셀 수 없다는 의미일까. 

그러나 아마도 이 부분은
살면서 걱정하는 일이 너무 많다는 내용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문맥상 명확하지 않고
애매하면 결국 시감상방법으로 넘어가야 한다. 

여하튼 
생각해보면 본인도 그렇다. 

기본적으로 생노병사에 대한 문제가 누구에게나 
내장되어 있다. 
그리고 매일 신문 뉴스 등을 통해 
예상하지 못한 사건 사고가 발생하는 것을 수없이 보기에 
당장 아무 문제가 없어도
늘 이유를 모르는 불안감이나 걱정을 가질 만하다고 본다. 


또 하루를 맞이하며 오늘 하루 무엇을 해야 
가장 가치있게 보내는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도 된다.

이런 때 이렇게 생각해보게 된다. 
삶에서 정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내일 죽는다 해도 
그리고 끝내 성취하지 못한다해도  
오늘 하다가 죽어가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런 것을 찾아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것 하나만 마음에 남겨 두고
나머지일은 모두 
씹다 버린 껌 
그 껌에 붙어 있는 먼지 처럼 관하고 
마음에서 내보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다고 본다. 

그렇지 못하면 마음은 온갖 먼지의 움직임과 함께 
산만해지게 되기 마련이다. 





○ [pt op tr]



문서정보 ori http://story007.tistory.com/1047#3366
10gfl--2015-04월_댓글보전.txt ☞◆vtcu3366


 








◆voph9489

◈Lab value 불기2559/04/02/목/18:03


♥ 잡담 ♥나의 정체에 대한 오류문제 

나의 정체와 관련하여 
little 님과 본인이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입장과 
불교의 무아설의 입장을 서로 대표하여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본다. 

'언뜻' '짧게' '대충' 생각하면
little 님의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입장이 옳은 것처럼 생각도 된다. 

무아설은 바로 이런 입장이 갖는 잘못을
밝히고 시정하는 것이라고 본다. 

물론 little 님은 본인이 제시하는 무아설의 입장이 
잘못이 있다면 또 제시하려고 노력하면 될 것이다. 

페이지
http://thegood007.tistory.com/1184
에 논의장소가 마련되어 있어서 
작성한 조각글을 옮겨 놓고
일부 편집도 해보았지만,
잘 안 된다. 

특히 어느 부분에 오타가 발견된다던지 수정을 할 때 
양쪽을 오가며 수정을 하는 것이 번잡하다. 

원칙적으로는 양쪽이 다 원본이고
잡담란 조각글은 내용상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보고 
무시하고 진행해야 하지만,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
오류를 방치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편집이나 글 쓰는 과정이 대단히 번잡해진다. 
문서정보란이 양 쪽이 같으면 그냥 복사해 붙이면 되는데, 
페이지마다 기재 내용이 다르다. 
그러니 또 단순하게 수정작업을 할 수도 없다 .

이 문제를 조금 더 고민해 보기로 한다. 
문서정보란에서 [co] with 표시는
서로 분간을 하지 않는 원칙을 
새로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여하튼 
여기 잡담란은 이렇게 잡담을 생각나는대로
기재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여기를 본거지로 하여 수정을 할 수 있는 만큼 
마치고 난 다음에 
관련 페이지로 복사해 붙이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나에 대한 견해는 
어떤 잘못으로 이끌고 가는가 .


08pfl--image/존재의_영역_설명.png
[img2-01] 08pfl--image/존재의_영역_설명.png


이 그림을 놓고 생각해 보자.
망상분별의 주 영역은 위 그림에서는 
관념, 분별, 판단 영역[2 @로 표시한 부분]과 

언어영역[5 % 로 표시한 부분]이 주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선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감각현실로 얻는 내용 가운데 일부를 놓고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감각현실[1 ! ]의 일부를 놓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또 이것을 더 연장해 생각하면, 
앞의 관념영역[2 @]에서 생각하고
감각현실[1 ! ]에서 얻는 내용을 
실재의 영역[3 # 라고 표시한 부분]에서도 

그렇게 실재하는 것이라고 나아가게 된다. 

가장 이론적인 측면에서 이런 생각이 갖는 잘못을 찾아 본다면, 
이런 식으로 나라고 생각하는 내용이 각 영역에 있다고 예상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 일치하는 내용을
각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는 점이 우선
가장 근본적인 잘못이다. 

현실에서 일정한 부분을 놓고 
반복해서 그것이 나다, 나의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지만, 
이것을 총체적으로 망상분별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다. 


감각현실[1 ! 부분]에서 

나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갖는 특징은 대략 다음이다.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 눈을 떠서 보고 다니는 동안,
그 모든 모습이 다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내용인데 
이런 감각현실을 배경화면으로 놓고 
관념 영역에서 
이 가운데 나의 부분과 나 아닌 부분을 구분하게 된다.

이 때 그렇게 분별하게 되는 기준이 문제가 된다. 

우선 자신의 기억을 통해서 생각할 때 
그 가운데 한쪽 구석의 일부분(자신의 몸 부분)은
그 동안 늘 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나머지 부분은 그 때 그 때 장소마다 상황마다
변화하고 달라지는 모습이었다. 

엄격하게 보면 자신의 몸 부분도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등장한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로 생각한다면 
이 몸 부분은 늘 출연하는 주인공과 같은 위치에 있고 
나머지 부분은 그 때 그 때 내용이 달라지는 손님과 같은 내용이다. 


- 또 그런 상태에서 자신이 몸을 저쪽으로 옮겨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움직인다고 하자. 

이 때 자신의 그런 뜻을 따라 움직여 온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 앞에서 자신의 몸이라고 본 부분이 그런 부분이다 .
여기에 자신의 몸에 부착된 신발이나 지팡이 우산 이런 작은 도구도
따라 오겠지만, 여하튼 이렇게 자신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부분을 
자신의 몸의 부분이라고 보게 된다 .

이에 반해 그대로 있는 부분,
또는 자신의 뜻과 달리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부분은
자신의 부분이 아니고 자신 이외의 외부의 부분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 또 하나 특징을 생각할 수 있다

손이나 발을 외부 사물에 접촉할 때 
촉감을 감각하게 된다.

또는 몸 속의 변화 움직임에서도 촉감을 얻게 된다.  

이런 경우 촉감을 느낄 때 양쪽 부분에서 촉감을 느끼면
그것을 자신의 부분이 자신의 또 다른 부분을 부딪힐 때
느끼는 감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에 반해 한쪽 부분만 촉감을 느끼면 그것은
자신의 손이나 발이 외부대상에 부딪힐 때 받는 느낌이라고 
보게 된다.

이는 촉각만의 정보로 얻을 수도 있지만, 
시각과 촉각의 공동 정보를 통해서 
그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촉각과 촉각이 양쪽에서 느끼는 것은 

촉각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자신의 한 부분)이 
또 다른 자신의 부분(촉각을 느낄 수 있는 부분)과 
접촉한 것으로 보게 된다. 

시각을 놓고 생각하면 
눈이 서로 다른 쪽 눈을 보는 경우라고 할까. 
그런데 눈은 그런 경험을 하기가 곤란한 것이고, 
촉각은 비교적 쉬운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눈에 보이는 사물을 집어서 
다른 사물을 접촉시키거나
또는 다른 사물쪽으로 던져 본다고 하자. 

사물을 집는 손에는 촉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사물이 사물을 접촉하는 부분이나,
그 사물이 던져 부딛히는 곳에는 
그런 사물이 보이더라도 
촉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경험을 통해 어느 부분은 나의 몸이고 
어느 부분은 나 이외의 다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좀 더 연구를 진행해보자. 
자신이 자신의 마음으로 얻는 감각현실이라는 점은 다 같은데 
왜 어느 부분은 자신이라고 보고 
다른 부분은 자신이 아니라고 보는가. 


거울을 놓고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경우를 생각하자. 
거울면에 보이는 모습이 자신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경우도 사실은 앞의 사정이 준용되고 있다. 

손을 올린다고 생각할 때 
손이 올라가는 부분이 나와 관련된 내 모습이다. 

여러 개 거울을 놓고 혼란스럽게 모습이 비추이는 경우를 
생각해도 사정이 비슷하다. 

거울을 보는 것이 오늘날 사람들은 익숙해져 있지만, 
그러나 본래 익숙한 내용은 아니다. 

원래는 자신이 자신의 앞 모습을 그렇게 
잘 비추어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눈은 눈을 보지 못하고 
마음은 마음을 직접 보지 못하고 

또 자신이 자신의 이마나 턱이나, 
뒷모습 등을 잘 보지 못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물은 
이런 제약에서 조금은 자유롭다. 


일단 대강 이렇게 
현실에서 감각현실 가운데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게 되는 부분이 나타난다. 

즉 감각현실을 배경화면처럼 놓고 
관념영역에서는 이러한 일정한 부분이나 내용을 놓고 
그것을 자신이라고 분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진짜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고, 
또 이런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행위와 결과를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
무아설의 내용이기도 하다.  

상식적으로 이런 생각이 별 잘못이 없는 것 같은데 
왜 잘못인가를 무아설의 입장에서는 
밝혀야 한다. 

이미 그 핵심적인 내용은 소개하였다. 

관념 영역에서는 그런 감각현실 부분을 가리키며 
나라는 생각을 일으켜 가진 것인데 
우선 그 감각현실에서는
정작 그 생각에 해당하고 일치하는 내용을 얻지 못한다. 

그것은 그 생각을 놓고 독립적으로
이 생각의 정체에 대해 판단하면 쉽다. 

눈을 감고 나에 대한 생각만 떠올린 상태에서 
그 생각이 어떤 내용인가를 검토해보자. 

그리고 그 생각과 대응시킨 감각현실로서 
나의 모습이 하나라도 그대로 떠오르는가를 
검토해 보자. 

관념과 감각현실이 서로 다른 것이므로 
관념에서 그런 감각현실의 내용을 얻어내는 것은 곤란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내용이
감각현실과 관념의 분리 관계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현실 속에서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 관념과 그 관념이 배경화면으로 놓고 대응시키는 일정한 감각현실이 
서로 무언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이런 생각이 자신을 그런 감각현실과 관념에
묶이고 매이게 만든다.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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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그런데 그 감각현실은 
이미 위 그림에서 보듯, 그 마음 안의 내용일 뿐 
실재가 아니다. 

1 이라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이 보는 자신의 모습은 
예를 들어 2 라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본 2^ 의 내용과 같다.

여기서 2 를 놓고 볼 때 2와 2 가 스스로 본 자신의 모습 2 ^의 관계가
서로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인가가 문제된다.
그림에서는 마치 서로 비슷하거나 비례관계가 있는 것처럼 
그려 놓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즉 감각현실로 얻는 모습과 실재의 모습은
그런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측면이 바로 오온 개공의 문제가 된다. 

여하튼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얻는 감각현실로 얻는 자신의 모습이 
자신의 실재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실재는 그 내용을 얻지 못하여 공하다고 말하게 된다.
그 실재에서는 감각현실로 얻는 모습은
얻지 못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감각현실의 일부분을 
진짜의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것은 곤란하다.

무엇이 실재의 자신인가 
실재 자신의 정체는 무엇인가는 좀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여하튼 일단, 현실에서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내용들이, 
모두 실재의 자신의 육체와 자신의 정신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 글이 길게 되므로 일단 간단한 내용만 제시하고 조각글을 나누기로 한다. 

이런 일반적인 나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은 
또 현실적으로 어떤 잘못을 유발시키는가를 살펴보자. 

참고로 
이렇게 각 부분에 나에 관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다른 감각현실이나 실재의 영역에 그대로 있다고 가정하면 
이론적으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보는 오류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것보다
현실적으로 그런 생각으로 행위하여 
일으키게 되는 잘못과 문제점들이 무엇인가를 
살피기로 한다. 
그런 점은 다음이다. 


- 우선 그렇게 보는 나의 감각현실 등이 고정되거나 일정하지 않고 
평생을 통해 달라지는데,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그 하나하나에 집착하게 되고 묶이게 된다. 


- 그리고 또 이를 바탕으로 일어나는 수많은 망상분별을 제거할 수도 없게 된다. 
오히려 이를 바탕으로 무한한 망상분별을 전개해나게 된다. 

망상환자가 망상과 망상을 결합시켜 무한히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전개시켜 나가는 것과 같다. 

- 그리고 현실 생활에서 중요한 점은 
이런 망상분별과 집착에 의해 
자신이 본래 희망하는 복되고 좋은 내용을 
가져오는 원인 행위를 하지 못하고 
그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를 행하게 된다. 

- 그리고 반대로 복된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는 
당장 자신에게 손해를 주는 행위 
당장 자신을 죽게하고 패하게 하는 행위 
바보같은 행위 등등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물론 망상분별과 집착
그리고 짧은 관찰과 얕은 지혜 
그리고 망상적 지식 체계에 의한 내용이다 .

그 내용은 
+ 좋은 내용을 집착하기에 이것을 아껴야 한다. 
이런 좋음을 다른 생명에게 베푸는 것은 손해다. 

자신의 좋음을 위해서는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
즉 다른 생명의 신체, 생명, 재산, 가족, 지위, 명예 등을 함부로 침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해도 아무런 나쁜 결과를 받지 않는다. 

자신이 좋음을 다른 생명이 침해할 때는 
이를 평안히 참고 지나치는 것은 바보스러운 일이다. 
곧바로 분노를 일으키고 보복하는 것이
상대의 악을 금지시키고
앞으로 다시 그렇게 하지 못하게 예방하는 좋은 방안이다. 
이런 등등의 판단을 행하고 
실제로 이에 바탕해서 행위해나가는 것이다. 

이는 비유하면 
장발장이 빵이 먹고 싶다고 
빵집의 빵을 향해 돌진해서 빵을 집고 
주인에게 잡히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빵에 집착한 상태에서 빵을 얻는 방안을 놓고 분별하면 
이런 얕은 지혜와 지식에 의한 내용을 옳다고 믿고 행하게 된다. 
그 결과 장발장은 체포되고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또 그 이후도 마찬가지다.
도망가면 된다.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빵을 먹으려면 
자신이 먼저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다른 이에게 
무언가 좋음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그 방안이라고 볼 수 있다. 

현실에서 돈을 주고 빵을 사먹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강도와 절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의미한다. 

그것이 현실인데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이런 바탕에서 
이런 내용의 인과관계를 깊게 지혜를 기울여 판단하면 
수행자의 수행목적과 그 성취방안
그리고  
일반인의 행위목적과 그 성취방안이
모두 정반대의 구조를 갖게 되는 이유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온 생명을 위하여 제한없이  <-> 좁은 자신의 극대 이익을 위하여 
자비희사의 마음을 갖고   <->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자를 물리치고 제압하기 위하여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 얻을 것이 있다고 분별하고 
집착을 갖지 않고  <-> 강한 집착을 갖고 
+를 베풀고  <-> 자신이 갖고 있는 +를 아끼고 
-를 가하지 않고  <-> 다른 생명에게는 함부로 - 를 가하면서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를 받으면 평안히 참는다 .<-> 자신이 -를 받으면 잠시도 참지 못하고 분노를 일으킨다. 

이런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처음에 
나를 무엇으로 보고 
집착을 일으키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와 
모두 관련이 되는 것이다. 

수행자가 앞과 같은 방식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은 
뒤와 같이 행위하게 하는 망상분별적 내용으로서, 
나에 대한 분별과 집착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다.

나와 나의 것이 망상분별임을 깨닫는 입장에서는 
이 망상분별을 제거함으로써
근본정신을 맑고 밝게 정화시킬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정려수행과 반야수행이 향하는 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망상분별 속에서는
부질없는 희론과 수많은 망상분별을 
쉼없이 행하는 것을
오히려 지혜롭다고 여기게 된다.

정려 수행이 마음의 집중을 통해 
도거(들뜨고 산만함)와 혼침(침체하여 가라앉음)을 제거하는 한편,
일정한 문제나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사유를 진행하게 함으로써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 도움을 얻게 되고 
반야 바라밀다를 통한 무분별지가
또한 현상과 실재를 관통한 깊은 지혜를 열어 주게 된다 . 
 
그러나 현실의 지혜는 한없이 산란함을 주거나, 
또는 의미없는 지식의 축적을 통해
마음의 피로와 침체 상태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오늘날 의학백과사전에 올라 있는 의학지식이나
물리학 서적에 올려져 있는 물리학 지식을 보자. 
이것이 그것을 전공하는 이에게는 산란함을 
그것을 전공하지 않는 이에게는 무의미함과 우울함을 선사하는 
내용이라고 보게 된다. 

대부분은 자신과 관계없는 전문지식을 생각할 때는
우울함을 느끼기 보다는
단지 자신과 무관하다 여기고
무시하고 외면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을 반복해 대하는 상황이 되면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쉽게 무력감을 느끼고 지쳐버리게 된다고 본다 .
 
별 소용이 없고 의미도 느끼지 못하고
대책도 마련할 수 없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희론적 지식들이 갖는 
효용의 한계이기도 하다. 

수학의 2차방정식과 인수분해를 열심히 잘 푸는데 
도대체 이것이 현실에서 어떤 의미를 자신에게 주는가를 물으면
그렇게 수학문제를 잘 풀던 이들이 잠시 멍해지는 것이다.
왜 이 문제를 그렇게 풀었던 것일까. 

어디엔가 분명 필요가 있다. 
사실 있기는 하다. 그런데 당신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런 현실 상황이
한편으로는 공연히 분주하고 산란함을 주고 
또 한편으로는 우울함을 준다. 

마치 딱지와 구슬이나 전자게임으로
세월을 보내야 하는 어른과 같다. 

또는 TV로 온갖 장소를 다 돌아다니고
드라마나 영화로 온갖 문제를 다 접하고 
관여하는데 
그러나 정작 이 어느 것 하나도 
자신에게 진정한 평온과 만족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한편 이런 나에 대한 생각은
사후의 문제나 현생의 삶에 대한 자세도 
서로 다르게 만든다. 

우선, 일반 생명이나, 수행자나 
삶을 각기 다른 환경 다른 모습으로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무수한 차별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
생명은 본질적으로 생명이라는 점에서는 같다고 할 것이지만, 
어떤 이는 파리로 삶을 시작하고
어떤 이는 개미로 삶을 시작하고
어떤 이는 박쥐, 또 뱀 이런 식으로 삶을 시작하는데 
자신은 인간으로 이러이러한 환경에서 태어나 삶을 시작한 것이다.

이런 차이가  
마치 각 주체에게 마치 로또 복권 번호가 추첨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그렇게 일어나게 되는 일로 생각하기 쉽다. 

[참고] 로또의 의미 
http://terms.naver.com/search.nhn?query=로또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은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은 인과에 의해 나타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자신이 이번 생에 이런 환경에서 이런 모습으로 
생을 시작하게 된 것은
그저 로또번호가 뽑여지는 것처럼 
모든 우연이 결합되어 
자신의 삶이 시작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자의식을 갖고 자신을 관찰하면
자신의 환경과 모습은 자신에게 특유한 것인데, 
이것의 출발점을 오직 
현생의 어린 시절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는 못한다. 

그리고 왜 자신이 다른 생명의 모습으로 태어나지 않고 
그렇게 시작하게 된 것인지는 이해를 잘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불가사의한 일이다. 

다른 생명의 입장을 놓고 이를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자. 
다른 생명 예를 들어 어떤 소나 어떤 말이 있는데 
입장이 전혀 다른 그 소나 말도 
사실은 그렇게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다. 
즉 알 수 없는 가운데 그렇게 그 몸을 자신으로 여기고 
무언가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왜 자신이 지금 이 모습이고 그런 소와 말의 상태는 아닌가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참 이상한 일인 것이다. 

바로 이렇게 삶의 시작과 끝을 보는 것은 
그저 그렇게 육체가 있어서 그렇게
알수 없는 상태로 우연히 이런 형태로 생활하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한편, 이 육체가 소멸되면
삶도 그것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앞에서처럼 
처음 자신을 피상적으로 관하는 입장과 관련된다 

자신이 보는 자신의 육체를 자신이라고 여기고 
그 외의 내용을 자신과 관련시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에 대해 피상적으로 분별하면, 
생사 윤회 문제에 관련해서도 단멸관을 갖게 된다. 
즉 죽어서 육체가 소멸되면 자신과 관련된 것이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에 따라 행위하게 되면 
생사가 단멸되어 죽음 이후 자신의 존재가 끊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자신이 원치 않는 형태로 
더욱 고통스럽고 안 좋은 상태로 삶을 새로 시작하게 된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무엇이 나인가의 정체 파악문제는
이런 점에서 일반적인 나에 대한 분별이
수정되어야 함을 함께 
지적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생사를 반복하면서 무한한 기간을 이어 
윤회를 받는 주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그리고 이는 결국 마음의 분석문제와 관련된다. 

눈을 떠 세상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그 안에 비추어 본다고 
할 때는 안식이 작용한다. 

이 내용에 대해 이것은 외부사물 저것은 나의 몸 이런 식으로 
분별하는 과정에 대해 의식이 작용한다. 

그런데 이런 정신은 모두 근본정신이 이번 생에 
이번 생명의 형태에 맞추어 만들어 낸 정신들이다. 

그래서 이런 작용을 기본적으로 갖는  
근본정신을 놓고 윤회과정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 근본정신도 진짜의 나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그리고 거기에서 제외되었던 근본정신은 또 무엇이라고 보는가 .
그리고 이런 과정에 진짜의 나란 존재가 있다고 보는가 없다고 보는가
하는 문제들은 모두
현실생활에서 집착을 가져야 하는가 
집착을 가질 필요가 없는가. 

이번 생에 무엇을 해야 한다면 
어떤 방향으로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선택하고 추구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수행자는 기본적으로 
보시-정계-안인-정진의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고자 노력한다.
이를 성취하면,  
복덕자량을 얻게 되고
이런 복덕자량을 갖추면 
다시 이를 바탕으로 지혜자량을 얻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생사 윤회과정에서
다른 생명을 널리 제도할 수 있는 
방편-원-력-지(분별지)를 갖출 수 있게 된다.  

수행자가 이런 수행을 하는 것은
이번 생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고 
무한한 기간 동안 
변역생사를 통해 
중생을 제도하고 성불할 것을 서원하는 가운데
이런 수행을 행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선택과 행위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나에 대한 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한 
생각과 다른 것이다. 





조각글이 심심하지 않게 되도록 빠짐없이 
노래를 올린다. 
무작위로 들리는 노래가 올라가게 되는데 
나탈리란 말이 반복해 들리는 노래가 이번에 선정된다. 

나탈리란 말에서 이 노래가  
나의 정체와 깊은 관련이 있는 노래라고 생각된다 

무슨 의미일까. 

일단 
나는 해탈하고 떠나리.
이렇게 시 감상을 해본다. 
그 다음은 
극락을 향해 떠나는 반야선에 난 올라 타리, 
이런 의미도 떠오른다. 

구글 번역을 돌려보니 
여기 나오는 나탈리는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는 관광 가이드인 것 같당. 






 ○ [pt op tr] mus0fl--Gilbert Bécaud - Nathalie.lrc




문서정보 ori http://story007.tistory.com/1047#9489

10gfl--2015-04월_댓글보전.txt ☞◆voph9489

[co] with 
http://thegood007.tistory.com/1184#9489
03fl--나-인식의-주체.txt ☞◆voph9489

 




◆vecz4779

◈Lab value 불기2559/04/02/목/11:09


♥ 잡담 ♥나의 정체의 논의 

나의 정체에 대해 논의할 페이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http://thegood007.tistory.com/1184 


그러나 무엇을 논의하려면 논의의 실익이 있어야 한다. 
왜 논의하는가에 대해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왜 논의하는가, 그 논의가 마쳐진 다음에는 그것을 바탕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

단지 little 님이 페이지를 만들어서 논의한다.

또는 
doctr 님이 목차를 만들어 두었기에 논의한다. 

이런 것은 충분한 답이 될 수 없다고 본다.  





페이지에 올리려는 글이지만, 페이지에 쓰기 보다는 
여기에 글을 쓰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한다. 

정식 페이지에는 이런 잡담을 기재하기 곤란할 것이다. 
글 쓰는 입장에서 잡담을 기재하지 못하면, 얼마나 심심한가. 
여기에 미리 생각나는대로 써보고 
나중에 정리하는 방향이 편할 것 같다. 

나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선, 
내가 나를 무엇으로 보던지 
있다고 보던지 없다고 보던지 
실재로는 달라지는 것은 그다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실 실재의 측면에서는
이런 논의 자체가 희론으로서 부질없는 논의라고 
취급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은 
사실은 망상분별의 세계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현실은 망상분별의 세계이다 .
그래서 이 망상분별의 세계에서 자신이 자신을 무엇이라고 보는 가가 중요하다.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한 행위로 인해 
그런 망상분별 속에서 다음에 만나는 상태가
그런 관계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현실의 망상세계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대단히 중요한 논의라고 해야 한다. 

한편, 이 논의는 행복론을 관통하는 핵심 논의라고 본다. 
그리고 통상적인 행복론이 추구하는
나 자신의 행복과 최상의 상태의 추구와 실현과 같은 내용을 폐기하고 
다른 곳으로 목표를 돌려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논의에서 나타난다고 본다. 
그래서 이는 더더욱 중요한 핵심 논의가 된다고 본다 .
기존 행복론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한 기초논의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논의는  
현상의 진리의 문제, 그리고 철학에서 인식론 주제와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데카르트가 인식되는 내용이 모두 참이라고 볼 수 없기에 
모두 의문을 갖고 대하는 가운데 
가장 확실한 내용으로 cogito 아사즉아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찾아낸 것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서 '생각한다' ' 나' '존재한다'
이런 표현들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인가를 
엄밀히 따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인식의 정확성과 진리의 문제와 깊이 관련되는 것이다 .

한편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불교의 무아론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기도 하다 .
특히 삶의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나아가는가, 
아니면 벗어나는가의 갈림길이 여기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편, 행복론 각론에서 다루는 각 수단은 
모두 그것을 바라보고 추구하는 개인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곧 그 입장에서는 '나의 정체'와 관련되는 것이다. 

나의 건강, 나의 생명, 나의 즐거움, 나의 부, 나의 명예,... 
나의 가족, 나의 국가...세계, 우주 등등으로 
아무리 다양하게 나열해도 
결국 모두 자신과 관련해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 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가장 기초적으로 다 문제되는 것이다. 

결국 현실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 모든 것이 
의미를 갖는 기준이 바로 자신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무아설은 
여기에 진짜의 나와 나의 것이 없는데도 
그런데도 자신이 있다고 여기며
이 모든 것에 집착을 갖고 대하는
이런 망상 분별 편집 증상을 시정하지 못하면 

감각현실에서 -> 관념을 형성시키는
그 버릇 습관 체계 때문에 
원래 그런 내용이 없는 상태에서 
윤회라고 표현하게 되는 생사와
또 각기 다른 생명형태에서 경험하게 되는 삶의 그 모든 내용을
망상세계에서 앞으로 무한히 경험해나게 되리라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것이 좋은 것이라면 권장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에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된다. 

지금의 망상 체계 즉,
실재 -> '감각현실 -> 관념 형성'의 관계를 고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행해 나가면, 
다음 생에서도 그 연장선으로
실재 -> 감각현실 -> 관념 ( 고통의 윤회)의 내용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곧  3 계 6 도에서의 무한한 고통스런 윤회의 내용이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이것은 본래는 없다고 해야 할 관계이고 내용인데 
앞의 망상환자들은
지금 현실에서도 이렇게 보고 
다음 생에서도 또 그렇게 보고 
무한히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범부중생은 무한한 윤회를 해나가고 
깨달은 입장에서는 늘 
그런 것이 본래 없는 진여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


그런데 왜 한편으로 
수행자에게는 그런 바탕에서 다시 
무한한 기간에 걸친 수행이 강조되는가. 


그것은 우선 수행자가
수행자 자신만 고려하지 않는다는 
특수 사정 때문이다. 

실재 측면만 보면 문제가 없는데 
그러나 이들 망상체계를 기준으로 보면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  
행복론에서 제시하는 각종  좋은 내용 즉, 
행복, 만족, 즐거움, 기쁨, 보람, 가치, 평온, 안정, 의욕 ,희망,
건강, 시간, 즐거움, ....등등을 나열하는데 
이를 외면하고 
수행을 강조하게 되는가. 

이는 그것만 보면 분명 좋다고 보게 되지만, 
이들에는 고통이 인과상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이 점이라고 본다. 

그 좋음을 붙잡는 순간
그것에 묶인 나쁨도 같이 받아야 한다.

이 상황에서 좋음만 받고 그에 결합된 나쁨 즉 고통을 
받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체개고라는 명제가 제시된다. 
이는 현실의 삶 가운데 좋은 것은 제외하고
나머지가 고통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 일체가 다 고통이라는 의미다. 

결국 행복론에서 제시하는 좋음의 목표는 
이런 측면을 감추고 좋음을 소개하는 것이 되기 쉽다. 

그리고 부처님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

비유하면 지금 바다 한 가운데에서
이 순간 섬을 향해서 갈 수 있는 데 
바다의 바람 빠지는 튜브를 향해 나아가라고
권유하거나,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다의 튜브는 물론 물에 빠진 것에 비교하면 좋다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바람빠진 튜브는 결국은 물에 빠져 고통을 겪는다는 내용이 
그 안에 이미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도 함께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향해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바다의 상황을 기본적으로 보는 수행자가
왜 이 바다에 뛰어드는 것은 또 왜인가. 
그것은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그 수행자가 바다에 빠진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그들을 구하고자 뛰어 드는 것이다. 

어느 상황이나 실재의 측면에서는 니르바나임을 관하고 
이 측면만을 문제삼는다면, 수행자는 사실 
자신만 그런 측면으로 모든 내용을 대하고 
자신만 니르바나에 들어가면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에게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가 구제할 수 있는
망상상태에 남아 있는 다른 이에게는 
그 차이가 큰 것이다. 

그래서 보살 수행자는 
자신의 구제만 념두에 두지 않고 
다른 중생의 구제도 념두에 두는 것이다. 

이 경우도 실재의 측면에서 본다면 
역시 문제되는 내용도 없고 구제할 바가 본래 없다고 보지만, 그
그러나 그들의 망상 세계 속의 내용을 기준으로 이를 보면 
해결해야 하는데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대단히 많다고 보게 되므로 
그런 입장에서 그런 문제를 해결해주고자 그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자는 그렇게 바다에 빠진 이들을 구제할 수 있을 정도로 
수영을 할 줄 아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수행자는 바다에 빠진 이들이 원하는 구조를 얻으려면 
사실 바다에 빠진 이들이 쉽게 하게 되는 그런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비유하면 물에서 허우적 거리면 더 빨리 빠진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그렇게 행하지 않고
남에게도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탐욕을 쫒아 아끼는 것, 
다른 이가 자신을 해치면 참지 않고 
분노가 일어나는 대로 분노를 일으키고 다른 이를 해치고
보복하는 것 
어리석음에 머물러서 삿된 견해를 일으켜 고집하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위 비유에서 물에 빠져 급한 나머지 허우적 대는 
행위에 해당한다. 


그리고 바다에서 좋은 상태를 얻으려면
원래 하려고 하던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행해야만 
그 망상 분별 상태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을 얻게 됨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먼저 행하면서 
다른 이들을 바다에서 건져내려고 하는 것이다. 

수행자는 이런 노력으로 그 바다에서 큰 튜브를 지어서 
평생 마냥 거기에서 희희낙락하며 잘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으로 비춰 보이는 것은 
수행자의 사정때문이라기 보다는 
물에 빠져 망상 속에서 생각하고 바라보는 이들의 생각이
그렇기 때문이다.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세계도 사정이 이와 같다고 봐야 한다. 
극락세계가 너무 좋아서 거기에 도착해서
무한히 그곳에서 평안하게 지내기 위해서
수행자가 극락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런 내용들이
결국 행복론에서 상식적으로 사람들이 좋다고 보는 그런 내용이 
갖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모든 문제가
모두 나의 정체의 파악에서 함께 해결되어야 한다고 본다. 



08pfl--image/존재의_영역_설명.png
[img2-01] 08pfl--image/존재의_영역_설명.png



현실에는 다양한 영역의 다양한 측면이 중첩되어 있다. 
그래서 이것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현실이 어떤 경우이던지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던, 
거기에는 문제가 없다고 해야 하는 측면이 있다.

위 존재의 영역에서 실재의 측면을 나타내는 부분이 우선 그렇다 .

3 # 라고 표시한 부분이다. 
참고로 이를 3 # 라고 표시한 것은 
실재가 원래 바탕이라고 할 것이지만, 
우리가 인식할 때는 그 순서가 뒤로 밀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실재 영역은
어떤 사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던, 무엇이라고 말하던, 
어떤 사태에 처해 있던
기본적으로 아무런 문제를 얻을 수 없다. 
고통도 생사도 생멸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이를 지극히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표현하게 된다. 
이는 세상에서 보게 되는 온갖 고통 온갖 악 온갖 문제를 
이 영역에서는 얻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1 !로 표시한 감각현실의 영역도 이에 준하게 된다 .
이는 현실에서 우리가 현상적으로 얻는 내용이다. 

그런데 정말 이 감각현실만 얻는 경우에는 
여기에는 역시 앞과 같은 문제를 이 안에서 얻을 수가 없다. 


그런데 현실에는 이런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망상분별의 영역이 이런 내용과 함께 있는 것이다 .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영역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대부분 이런 관념 영역을 함께 갖고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앞과 같은 실재의 측면으로 현실을 대하면 
청정한 니르바나인데 
그러나 망상 분별 영역에서 판단하는 내용으로 대하면 
지극히 억울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등등으로
고통과 고뇌를 호소하게 되는 사태가 된다.

그리고 이런 망상분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를 끝내 버릴 수가 없으면
이 증상도 버릴 수 없다.
그래서 이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집착을 일으키고 행위하면
이 업을 통해 
다음에 만나는 상태는 
곧 그가 역시 망상 속에서 
고통으로 받아들일 도리 밖에는 없는 상황이 된다. 

그 감각현실이나 그 실재에는
그런 내용이 없음에도
앞의 바탕에서는 
마치 지금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얻는 것처럼 
그런 고통의 내용을 얻게 되는
상황이 된다. 

그것이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이어 나갈 때
생명이 윤회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내용들이다. 

그것이 곧 지옥-아귀-축생-인간-아수라-하늘의 
3 계 6 도의 내용이 된다.

같은 상황을 놓고 망상분별자는 
그래서 고통의 내용이 무한히 전개되는 것을 보고 
이를 자신의 내용으로 경험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

그래서 이것을 처음부터 끊고 벗어나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 출발점이 바로 자신이 이 가운데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지금껏 나와 나의 것으로 본 것들이 
일으키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치 포로가 묶인 수갑을 풀어야 탈출하고 
수용소까지 끌려가 고통을 겪지 않듯, 
수행자도 이 집착을 벗어나야 
고통의 윤회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될 수 있다. 


삼계 육도의 윤회에서 
하늘은 좋은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짧은 견해인 것이다. 
이 상태가 곧
바람빠진 튜브와 같고
이를 목표로 할 때
역시 고통의 윤회에 묶이게 되는 것이다. 

마치 세상에서 돈을 추구할 때 
그로 인해 일이나 지위에 모두 묶이게 되는 것과 
사정이 같다. 





글을 쓰면서 한편으로는 걱정이다 .
이 글이 little 님과 doctr 님에 의해 받아들여져 
행복론 총론과 각론 각 부분의 구조를 변경시켜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잘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이런 군더더기 말도 잘 편집해가면서 
체계와 실질적인 내용변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




doctr 님의 글을 보다 다음 노래를 발견했다. 
무슨 뜻으로 올린 것인가. 
시감상이 각자 독자적이기 때문에 
알기 힘들다. 
그래서 일단, 구글 번역 내용을 참조하게 된다. 


그런데 이를 계기로 본인의 언어 능력에 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생각해보니, 
불어도 말할 줄 모르고 
영어도 말할 줄 모른다. 

여기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언어란 실질의미에 도달시키기 위한 각기 다른 암호일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그 이후 외국어 공부에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로 인한 피해는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외국어 문제로
중요 고비마다 장애를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언어를 공부할 동기를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각국의 수많은 망상분별자들을 망상에서 건져내려면 
그들의 망상체계를 먼저 이해해야 하므로
외국어 공부가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글 번역기가 좀 엉터리라고 해도 
앞으로는 한 문장씩
영어와 불어를 같이 외어볼까 생각 중이다 

시감상을 중시하고
언어를 무시하는 평소의 습관이 잘 교정이 안 되겠지만, 
한 문장씩 외어 보는 것이다. 

노래를 들어 보니  
사공 송이라는 소리가 반복된다. 

1 : 00 부분이다. 

가사 부분을 보니 
Et tu cherches à comprendre
Ça sert à rien tu perds ton temps
이 부분인 것으로 생각된다. 

kmp 로 f5 f6 을 누르면 그 구간을 무한 반복한다 .

이 예쁜 가수가 날 위해 무한히 같은 말을 노래 불러주니
좋기는 좋다. 

문제는 아무리 들어도 저 철자 부분과
들리는 소리가 서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

사공 송 이런 부분에서 철자로만 보면 
영어식으로 읽는다면 컴프렌드레 이니,
이런 비슷한 소리가 들려야 할 것 아닌가. 

무식함을 토로하지 말고
네이버 불어사전의 발음을 참조해 보기로 한다. 
http://dic.naver.com/search.nhn?dicQuery=comprendre
사전 발음을 들어보아도 여전히 이상하다. 


이제 속도를 조금 늦추어 본다. Shift+ Num -- 를 누르면 된다. 

문제는 그래도 그렇게는 절대 안 들린다는 점이다.  
반복이 질릴 때는 f8 을 누르면 해제된다. 

이 부분의 구글 번역은 다음이다. 

And 

you try to understand

It is useless 

you waste your time


지금 본인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언어를 배우려면 다음 자세로 익혀야 한다고 본다.  
언어는 묻거나 따지지 말고 무조건 
그런 소리를 듣거나 그런 글자 모습을 보게 되면 
그러그러한 의미를 떠올려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불합리한 요구를
그대로 순종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왜 꼭 그래야만 하는가 이런 것을 물으면 퇴장이다. 

언어는 사실 불합리한 관념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특히 외국어를 볼 때 그것을 쉽게 알아채게 된다. 

무슨 물건에 남녀가 있겠는가. 
왜 영어에 3인칭 단수현재에는 -s 를 붙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안 붙여주면 모르는가? 
왜 꼭 단수 복수 일일히 신경쓰는가, 
물건 사고 팔 때만 숫자를 세 붙여주면 되지.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면
상대가 "글쎄 그걸 미처 몰랐넹. 앞으로 고쳐서 사용하자" 
이렇게 받아들일 것 같은가. 

심지어 주어가 남성 여성 단수 복수인가에 따라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꼴이 달라져야만 
이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본래 그래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제일 심한 것이 산스크리트어가
아닌가 한다. 
심지어 명사가 한개인가 두개인가를 따져서
각기 다른 꼴을 취하려 한다. 
그러면 왜 3 개 4 개는 구별안하고 그 이후부터는
다 함께 복수로 취급하는가.

결국 이 각각의 경우에
쓸데없는 분별을 미리 행하기 때문이다. 
그런 분별이 없으면 언어가 그런 구별을 취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않은 것이다. 

모든 명사에 성별 구별하는 입장을 취하는 이에게는 
컴퓨터가 당신 눈에는 여자로 보이나 남자로 보이나,
물어봐야 한다. 중성이라고?
little 님 컴은 여자라고 봐야 한다. 왜? 이유는 말할 수 없음. 

여하튼 사정이 이렇기는 한데 
그러나 언어를 배우려면 상대방의 불합리한 습관에
일일히 따지지 말아야 한다. 이 모든 불합리함을 
인디언이 처음 블란서인이나 미국인을 만나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거나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하고 
무조건 받아들여 하는 것이다. 

아무리 반복해 들어도 
사공송 즉, 사공의 노래로 들리는데,
이 문제 상황을 치료할 방안은
묻거나 따지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뿐이다. 

시 감상방법으로 들으면 
조금은 쉽게 들린다. 

시간 끌지 말고 
그 모든 것이 부질없고 
필요없다는 것을 빨리 깨달으라. 
이런 취지를 나타내기 위해
노래 부른다고 생각한다. 






○ [pt op tr] 가사 mus0fl--Graziella De Michele - Le Pull-Over Blanc.lrc




문서정보 ori http://story007.tistory.com/1047#4779
10gfl--2015-04월_댓글보전.txt ☞◆vecz4779
[co] with 
http://thegood007.tistory.com/1184#4779

03fl--나-인식의-주체.txt ☞◆vecz4779

 




◆pgru7974

◈Prince evilstupidmiserable Little 2015/04/02/목/00:46


♥ 잡담 ♥무엇이 진실인가. 

신문기사를 읽는데
엉터리 기사다.
신문사가 버젓히 사실이 아닌 기사를 올려서 
분노가 일어나 한마디 하자, 

lab 님이 망상분별세계 안에서
진실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렇게 의문을 제기한다. 

언어 관념으로 된 내용 가운데 
진실이란 본래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참고기사] 뭉칫돈 스님지갑 주웠다가 후덜덜…'대반전'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5040110025108456


사건 내역인 즉 화장실에서 발견한 지갑을 주었는데 
지갑안 사진이 조폭 비슷해 보였다. 
이 지갑을 돌려 주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스님이었다. 
주은 돈은 얼마 안 되는데
사례금으로 엄청 많은 돈을 통장으로 보내주었다. 
그 스님이 계시는 절은 만우절. 

이런 식이다. 
스님이 계시는 절이 개천절이나, 
삼일절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 잡담 ♥[co] 표시용 핫키 

[co] 표시용 스크립트 작성은 다음과 같이 하면 될 것 같다. 

우선 페이지마다 기본정보가 다 다르므로
페이지 정보가 적힌 부분에서 도킹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기본 변수가 등록된다. 

그 다음 그 변수에 덧붙여 넣어야 할 내용이 
☞◆ 이하 부분에 모두 들어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의 정보를 통해 
내용만 바꿔 기재하게 하면 될 것으로 본다. 

이 내용을 일정한 변수에 보관한 다음 
각 페이지를 오가면서 
해당 위치에 복사해 넣게 하면 되리라 본다. 
다만, 복사해 넣을 위치를 정하는 것은 수작업을 통해
해야 한다고 본다.

co,1  => 페이지 정보가 기재된 곳
co,2  => 원래 있던 곳 

문서정보 ori http://story007.tistory.com/1047#7974
10gfl--2015-04월_댓글보전.txt ☞◆pgru7974

 


◆vqvf6344

◈Lab value 불기2559/04/01/수/19:35


♥ 잡담 ♥조각글복사이동

little님 요청에 의해
최근 '나의 정체'에 대해 쓴 글을
복사해 옮겼다.
http://thegood007.tistory.com/1184

원본이 새 페이지로
옮겨가고,
동시에 
잡담란 조각글도 
여전히 원본 자격을 잃지 
않으므로 

각 조각글 문서정보에
[co] with 표시를 해주는데 

상당히 번거롭다. 

마음같아서는 자동처리될 방안이 
없는가 생각해보게 되지만, 

문서정보 기재시 
페이지 도킹을 해서 
처리하게 되는 내용을 보니 
문서정보 사항이 다 개별적이라 
쉽지 않아 보인다. 

little 님이 키 두번 사용할 것을 
한 번 사용하게 하는 스크립트요청은  
되도록 하지 말라고 해서, 
고민 중이다. 

내 생각에 
잡담란의 조각글이 
독립 페이지로 나가게 되면 
준 소논문 정도로 보고 
문장을 완전히 고쳐야 한다고 본다. 

군더더기 내용도 빼고 ~
그런 것을 관리자가 알아서 
할 수 있는 권한과 함께
해당 조각글에 
원본자격을 부여함. 
( 탕 탕 )

Team bs 동영상에 나오는 신발 가운데 
http://story007.tistory.com/1047#shoe
mun 님과 tok 님이 신은
신발 상표가 무엇이냐고 
묻는데 
간접 광고 내용을 알기 힘듬 




 





그러나 시 감상상으로는 
신발이 갖는 의미가
대단히 중요하다. 

대력성취보살과 구별되는 
초발심 보살을 
신발의 보살 이렇게도 표현하기
때문이다. 

참고 신발의보살

【新發意菩薩】新發求取菩提之意的菩薩, 爲二種菩薩之一


신발과 관련된 내용이 
삼국유사에도 나온다. 

○ [pt op tr] 낙산의 관음ㆍ정취 두 보살과 조신 [洛山 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3640&cid=49616&categoryId=49616


신발의보살 및 대보살 급에 아직
이르지 못한 수행자들이 
대력성취보살을 친견하기가 
몹시 어려움을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본다. 

이 책에서는 
관음보살의 진신을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인들로 보지만, 
이야기에 등장하는 파랑새라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

여하튼 왜 수행자에게는 
대보살님들이 여인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는가. 

대력성취보살이 
준비된 것을 수행자에게 
건네주기 전에 

그 수행자가 
왠만한 수행을 통해서는 
쉽게 넘기 힘든 유혹과 장애를  
넘었는가 넘지 못했는가
이런 것을 
시험해보는 것이 필요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mun 님이 약간의 수행으로
파리로 변신이 될 수 있게 된 뒤부터 
종종 파리로 변신해
파리대왕이 되어서 
암파리만 찾아 돌아다닌다.   

이런 증상이
수행자가 시험을 거치지 않고 
무조건 준비된 내용을 
넘겨받게 될 때
갖게 되는 위험성이라고 본다.


동영상에서 
어느 부분에 
본인이 나타나는가 하는 
엉뚱한 질문도 받게 되는데 
이 동영상이
본인에 관한 내용인가용? 

수염이 특이한 분은 
조금 다르지만,  
인상착의가 real 님 비슷해 보이는데용










전 참고로
bs team 동영상에서 
흰 소매 차림입니당. (^^)

특징 운전대 잡는 분 뒷쪽에 앉는 특징~

http://story007.tistory.com/1047#shoe

참고로 
여환삼매를 증득하면 
캐릭터 상의 특징이 없어집니당. 

상대에 맞추어서 
상대의 제도에 가장
적절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특징만이 
유일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당. 

일단 수행자의 목표점이당.  

여환삼매를 증득하면, 
엄청 재밌을 것 같지 않은가. 


시감상방법과 별도로 
원래 이들이 무슨 의미를 
말하고자 하는가를 알기위해 
구글 번역결과를 검토해 보는데 

잘 모르겠다. 

I do not forget where I came from


If I did not turn around, is that the past binds me. 


Team BS with the team you support
I found my way and I go without trouble

가사 가운데
이런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 


첫번째 문장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잊지 않는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가. 

답은 진여, 본각 이런 것이 아닐까. 

두번째 문장은
문법적으로 잘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시감상법을 동원해 해석해보면 
little님의 pass-stop-turn-go 의 방안에서 
적절히 turn 을 하지 않는다면, 
불교용어로 회향을 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는 내용으로 본다. 

세번째 문장은 
BS team 은 AS team 과 같이 
활동한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BS team 이 좀 게을러도 
무사할 수 있다. 

한편  본래 일체가 그 상태 그대로 
다 니르바나다
따라서 본래 문제란 없다 .

이런 내용과 
관련된다고 본다. 

그렇다해도 BS team 은
BS team 대로 
AS team 은 AS team 대로 

열심히 활동해야 하는 것이다.



본래 얻을 것이 없고, 

중생도 없고 
보시할 물건도 없지만, 
그래도 열심히 
보시하고 제도하라고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가르치신 것처럼

본래 니르바나이지만, 

삶과 세상, 여기저기 이부분 저부분에 
미리 예방하고 막아야 할 일과
뒤늦게나마 수리하고 고쳐야 할 것이
많은 것처럼 여기고 

BS team과 AS team 은 
열심히 활동해야 하는 것이다.

본래 니르바나이고 청정한 진여인데도 
왜 그래야 하는가. 
왜인가? 

그 이유는 그대로 두면, 
mun 님과 little 님이
몹시 불편해하기 때문이다. 



문서정보 ori http://story007.tistory.com/1047#6344
10gfl--2015-04월_댓글보전.txt ☞◆vqvf6344




 





◆pqbx2854

◈Prince evilstupidmiserable Little 2015/04/01/수/17:39


♥ 잡담 ♥나의 정체에 대한 연구

세상이 어쩌구 사회가 어쩌구 
이렇게 이야기해도 결국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부분에 
초점이 맺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의 정체체 대한 논의를 하는 페이지를 
마련하고 논의를 할까 한다. 

그러나 막상 페이지를 마련하고
논의를 하려니 
너무 논점이 많다. 

너무 논점이 많으면 집중이 안되고 
산만해지고 
정리하는 입장에서는 
기피하고 싶은 페이지가 된다. 

인턴연구원들이 요즘
모두 공부를 포기하고 
게임에만 몰두한다. 

같은 현상이라고 본다. 

복잡한 일로 보이게 되면 이를
미뤄두고 
당장 하기 쉬운 일만 
하려고 하기 쉽다. 

그러나 여하튼 
lab 님의 궤변인듯 궤변 아닌듯 궤변스러운 
나의 분실 주장을 시정시키는 것을 목표로 
일단 페이지를 만들어 보고자 한다. 

나의 정체에 대해 관련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하면 
되도록 이곳 페이지를 이용해주기 바란다. 
=> 
http://thegood007.tistory.com/1184





○ [pt op tr] mus0fl--Marc Lavoine - La Semaine Prochaine.lrc



문서정보 ori http://story007.tistory.com/1047#2854
10gfl--2015-04월_댓글보전.txt ☞◆pqbx2854
 






◆mycg2306

◈Mun Tokyun 2015/04/01/수/13:54


♥ 잡담 ♥배우지 않은 내용은 기억되지 않는다. 

lab 님의 글을 보다가 오래전 본 노래 동영상을 
떠올리게 된다. 

문제는 그 노래가 불어 노래라 무슨 노래인지 
제목을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최소한 LAB님과 본인이 가장 기초적인 내용으로 
불어단어는 어떻게 쓰고 어떻게 읽는가 이런 것이라도 
학습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강 이러이러한 노래라고만 하니 답답하게 된다. 
여하튼 간신히 찾아 내 올리면서 글을 쓰게 된다. 


이 노래에서 1868 년이란 숫자가 나오는데 
과연 그 때 LAB 님과 본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불가사의한 일이다. 

물질적으로 보면 
지금 살고 있는 이는 
어떤 일부는 과거 어떤 곳의 배추 잎에
또 어떤 일부는 어떤 소나무 잎에 
또 어떤 일부는 바다 속에 이런 식으로 
지금 몸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 분자들의 
위치와 상태를 서술할 지도 모른다. 

또 어떤 이는 불완전한 생물학 지식으로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그 당시는 아마도 모두 자로 끝나는 이름으로 불리우며 
훈련 중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다 이름이 정자 아니면 난자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보리심의 교육을 받다보면 
전혀 엉뚱한 내용을 듣게 된다.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다. 
뒤집힌 상태에서 정보를 섭취하므로 
그런 오해를 하게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궁금한 것이다. 

노래를 들어 보면 
1868 년 보디사뜨와에게 
대서부에서 무슨 일인가가 있었다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인가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

오늘 단어 하나를 외운다 
루미에 
다음에도 노래를 잘 찾기 위해서 

루미에란 무엇인가

루는 불교 용어로 번뇌 
미는 ? 에는? 


번뇌의 미국땅을 의미하는 것인가. 

백과사전을 검색해 찾아보니, 
1868년 일본에서는 명치유신이 일어난 것으로 위키백과에 나온다. 
그리고 당시 조선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를 하고 있었다고 나온다. 

이렇게 보면 사실 일본과 한국이
근대 문명과 기술을 접한 것은 간발의 차이로 보이는데, 
20 여년의 격차가 벌어지고 난 후
그 격차는 더이상 걷잡을 수 없게 되고 
그리고 반복하고 싶지 않은 역사 현실
대략 300 년 전에 조선 땅에 있었던 것과 유사한 역사현실은 
다시 조선에 일어나고 만다. 

배우지 않은 일은 기억되지 않기에 
매번 새로 수고를 반복해야 한다. 

그러나 보디사뜨와는 이런 것을 먼지로 여긴다고 하니, 
진공청소기로 청소를 하게 되고, 

보리밥이 건강에 좋다고 해서 같이 먹는데 
보리알은 잘 안 씹힌다. 

노래에서 이런 소리가 들린다. 

...
글을 그만 써야 할 것 같다. 
왜 카페에 LAB님과 본인이 손을 댔을까? 
어떡해야 좋을까? 
..
알아들어야 하는데 
...
그러나 막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여하튼 답은 루미에인 것 같다. 








○ [pt op tr] mus0fl--Calogero - Grand Corps Malade - L'ombre Et La Lumière.l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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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qts5891

◈Lab value 불기2559/04/01/수/11:55


♥ 잡담 ♥보리의 정체


[ 위키백과- 보리의 모습] 보리 보리   보리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보리



어제부터 밥에 보리를 섞어 먹게 되었다. 
이전엔 다른 잡곡이나 현미를 흰쌀과 섞어 먹고 있었는데 
보리가 생각해보니
환경과 건강에 좋은 곡식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선 보리를 재배하는 과정에는
살생이 그다지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농사가 무슨 살생과 큰 관련이 있는가 생각하게 되지만, 
농사를 통해 수입을 얻는 입장에서는 
재배과정에서 병충해를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기에 
알게 모르게 살생이 많이 이뤄진다고 본다. 
이것이 또 식품의 잔류 농약 등의 문제로 
건강과 깊게 관련이 되는 것이다 .

자신은 결과물만 시장에서 사먹기에 
이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정이 그렇지 않다. 

결과물을 사먹는 입장도 
이런 업과 그 과보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을 생각하면, 
수행자는 
우선 당장
이번 생에 자신이 먹었던 음식 가운데
자신의 음식섭취와 관련하여  희생된 
많은 돼지나 소 닭 물고기 등부터라도
우선적으로 반드시 제도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여하튼 보리는 
추운 날씨에 재배하는 곡식이라, 
비교적 그런 살생과의 관련성이 줄게 된다고 본다 .

보리는 과거에는 쌀에 비해 가격이 싼 곡식이었다. 


그런데 보리가 가격이 싸다는 것은 
아주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요즘은 보리 가격이
그렇게 싸지 않다고 한다. 

다만, 가격 자체는 정확히는 잘 모른다. 

생계를 빙의 기생 상태로 해결하기에 
보리가 좋다는 의견만 제시하고
직접 보리를 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리는
수행자에게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수행자가 정말 수행을 통해서 
수확해야 할 내용이 있다면 
바로 이 보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정을 알고 보면 

이 보리는 어디에 없는 보리를 새로 만들어내
얻는 것이 아니고 
모든 생명에게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왜 수행자가 수행하고
이것을 얻는 것이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현실상황은 또 
이 보리가
망상분별과 집착 번뇌 등으로 
덮여져 있어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mirror


예를 들어 
본래는 다 밝은 거울인데
거울표면에 먼지가 가득 쌓여 있거나 
누군가 검은 칠을 잔뜩 해 놓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수행을 하면
원래의 본바탕이 드러나서 
마치 원래 없던 보리를 새로 얻는 것처럼 생각이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보리는 원래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이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에 
원래부터 깨달음이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는 
경전들 예를 들어 원각경 등을 붙들고
위경이라고 시비를 일으키는 
수행자도 있다고 한다. 

또 왜 본래부터 보리가 갖춰진 상태라면서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되었는가. 
이런 의문을 갖기도 한다고 한다.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의문에 답하는 것보다는 
현실 상황의 자신이 
보리를 얻지 못한 상태라고 본다면, 
이 보리를 새로 만들어 얻어내던,
원래 있던 것을 되찾아내던
여하튼 빨리 얻어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점이다.  

선배 수행자들이 준비된 내용을 받아서 
빨리 복사해 사용하라고 권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급한 일은 그래서 보리를 빨리 복사해
사용하는 일이다.
다라니 삼매 작전 즉 
다삼작전에서 할 일은 그것이기도 하다. 




원래 한 조각글에 하나의 노래만 붙이는데 
아래 조각글에는 글 내용상 관련되는 노래로 두개의 노래를 붙였었다. 

그러나 글에
너무 노래가 많아도 
좋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다시 이 조각글로 옮겨 왔다. 

시감상차원에서
의미가 있는 노래라고 본다. 

수행자 선배들인 
bs team ( 고통 장애 사전제거 서비스팀 -before service-team )이 
수 겁전부터 미리 준비해 놓은 것들이 많은데,
이것을 빨리 빨리 후배수행자들이  
받아서 잘 사용하기를 바란다는 취지를 노래하는 것으로 
이 노래를 감상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렇게 쉽게 노래를 올리는 것도 
미리 복사해 붙일 내용들이 
인터넷에 다 미리 준비되어 있어서 
복사해 붙이기가 쉬운 것이기도 하다 .

문제는 ctrl +c 와 ctrl +v 키를 잘 
누르는 일이라고 본다. 

오늘날 경전 내용도 사정이 같다. 
사이트만 잘 찾아가면 
경전 내용을 모두 쉽게 이용할 수 있다. 

다삼작전 즉 다라니 삼매 수행작전에 전념하는 가운데 
필요한 다라니 삼매도 사정이 비슷하다. 


자신의 마음 안에 빨리 복사해 붙여 놓으면 
그 모든 것을 자신이 곧바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다라니 암기부터 해보려면 잘 안 된다. 
쉽지 않다. 

다라니 단어 외우는 것마저도 쉽지 않은데 
그러나 그에 관련된 내용을 하나하나
직접 다 개발해서 사용하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사실은 본인은 일상생활 과정에서
자동차 운전하는 것도 힘들다고 여긴다. 
시간과 돈, 그리고 위험이 많이 따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로를 직접 만들고 
자동차도 직접 만들고 
여기저기 다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힘이 많이 들 것인가. 

수행에 있어서 
쉬운 방안만 찾아 다니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고, 

직접 여러 장애를 불러들여 놓은 가운데 
새로 좋은 수행방안을 개발해보기 
벽돌로 바늘 만들어 보기 
이런 것도 필요하기도 하지만, 

일단 선배 수행자들이 전해주는 좋은 내용부터  
빨리 복사해 붙여 놓기 
이런 노력이 먼저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


그리고 보리도
그런 항목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매일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마음에서 보리심을 세워 일으키기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pt op tr] mus0fl--Team BS - Fierté.l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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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mw3253

◈Lab value 불기2559/04/01/수/09:25


♥ 잡담 ♥복사CTRL+C  키의 효용

컴퓨터가 정말 편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길게 작성한 글을 복사해 다른 곳에 붙일 때이다. 

원래는 열심히 써야 하는데, 
간단히 복사해 붙이면 되기 때문이다. 

처음 이것을 열심히 작성한 입장에서는 
다른 이들이 간단하게 복사해 붙이고 
심지어  마치 자신이 직접 그것을 작성한 것처럼 내세우는 모습을 보고 
이를 싫어하고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수행자는 그 반대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는 것을 권장하게 된다. 

복사해서 붙이면
쉽게 원본과 같아진다는 것을 
매우 좋은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이 경전에 나오는
수희원요(隨喜願樂)의 내용이라고 할 것이다. 


가장 가치있는 내용을 자신에게 복사해 붙이는 방안은 
어떤이가 보리심을 일으켜 수행을 시작하는 경우와 같이 
선한 뜻을 일으키고 선한 행위를 할 때 
또 그로 인해 복을 받는 모습을 볼 때 
그것을 같이 기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 기뻐함 - 수희-를 넘어서
자신도 그와 같은 뜻을 갖고
그런 상태를 실현하기를 원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는 다시 그렇게 하고 
자신도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복사의 과정이다. 

세상은 수행자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행자들 사이에서 권장되는 복사와 붙이기 방안은 
일반 현실에서는 준용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기본 원칙은 부처님 법이 옳고
부처님법이 적용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수희원요를 행하는 이는 
아주 쉽게 무량한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내용인데, 
이것은 세속의 법이 어떠하든 
일반적으로 인과관계에 따라 적용되는 내용이라는 의미다. 
 
다만, 
따라 기뻐함에 대해서 주의할 바가 있다. 
세속에서 좋다고 보는 바를 
자신도 좋다고 따라하는 것은 
부처님이 수희원요하라는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경우에는 그와 반대의 결과를 얻게 된다. 

이런 것이다. 
자신을 누군가 때리는데 
옆에서 그것을 같이 기뻐하는 이가 있다고 하자. 

이런 경우 자신은 때리는 이도 미워하지만, 
그것을 같이 기뻐하는 이도 또 같은 정도로 
미워하게 된다. 

그래서 선하지 않은 일에 대해 
같이 기뻐하면 이 경우는 앞의 수희 원요의 경우와 달리 
복과는 반대의 내용인 화를 받게 되는 것이다. 

자비희사를 말하는데 
슬퍼해야 할 일에 대해 슬퍼해야 하고 
기뻐해야 할 일에 대해 기뻐해야 하는데 
이것이 뒤바뀐 경우는 
뒤바뀐 결과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경전에 나온다. 
동네 아저씨들이 연못에서 물고기를 잡을때 
한 꼬마 아이가 그냥 따라서 좋다고 손뼉을 쳤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그 후 그 아이는 그로 인해 
나중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을 겪었다고 
술회하시는 대목이 경전에 나온다 

연못에서 물고기를 직접 잡았던 이들은 
땅에 묻혀 코끼리에 밣혀 죽임을 당하거나, 
불에 태워지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위 이야기에서 나오는 꼬마 아이가 
바로 부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위 이야기는 부처님 당시 
석가족 왕국이 이웃국가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 내용과 관련되는 내용이다. 


인과응보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신문이나 tv를 보고, 
세상을 보다 보면
너무 어처구니 없고 
억울하게 느껴지는 일이 많다. 


내 호주머니에서 10 만원이 든 지갑만 없어져도
한 3 일 정도는 속이 아프게 느껴지는 것이 
현실이다. 
부자거나 가난한 이거나 다 심정이 마찬가지다. 
부자라고 해서 돈을 잃어버려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부자의 경우가 더 심하다면 더 심하다고 보아야 한다. 


생존에 필요한 비용을 타인에 대한 빙의와 기생 형태로 해결하고 
그 외로는 한달 3 만원을 넘지 않은 가운데 
생활을 하고 있는데, 
신문 등에 나오는 사고 사건 관련 기사를 보면 
조금은 충격을 받게 된다. 

피해 발생액이 수백억원 수천억원은 기본이고 
문제가 좀 된다고 보는 경우는 수조원 수백조원 대의 
액수로 제시된다. 

전화 사기를 당해서 외국으로 보내주는 돈 액수도 
한해 수천억원대를 넘는다고 한다. 

또 사기를 당하고 투자를 잘못해서
외국기업에게 줘버리고 피해를 보게 된 돈 액수가  
수십 조원대라고 보고를 받는다. 

이런 사건 사고 문제를 하나같이
내 지갑의 문제로 바꿔 생각하면 
잠이 잘 안 올 만큼 중요한 문제로 여기게 된다. 

관련된 보고를 계속 듣다 보니, 
이렇게 해서 발생한 피해를 
국민 연금과 같은 공적기금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보고도 듣는다. 

[참고기사] 정부, 국민연금 동원해 자원외교 설거지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1099385
http://bizn.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1503301032281&code=920100&med=khan




개인적으로 장차 국민연금을 통해
남은 생 동안 생존과 생계를
해결하려고 하는 입장인데 
이런 사고소식을 계속 듣다보면
이 기금도 그렇게 안정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


결국 기금이 이런 식으로 운영하다 손해를 보게 되면 
지금 공무원 연금처럼
원래 처음 계획하고 약속했지만,
사정이 달라져 줄 수 없게 되었으니
양해해달라고 나서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 정말 평소에 
타인에 대한 빙의 기생활동을 하고 
3 만원으로 한 달을 보내는 등으로
훈련하지 않은 이들은 견디기 힘들게 될 것이다.  


물론 아무리 잘하려고 노력해도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실수가 있을 수 있지만, 

또 이런 공공의 자금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이들이 
이런 공적 재산을 다른 입장에서 쉽게 보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고 본다. 

즉, 공적 재산은 자신의 재산이 아니기에 
이런 공적 재산이 큰 손해를 본다해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이와 따로 있다고 보게 되면, 
이런 문제가 곳곳에서
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하튼 이런 사건 사고의 내용을 보다보면 
한달에 3만원 정도를 사용하는 것은
너무 작은 액수라고 보게 된다. 



그래서 본인도 이런 사건 사고를 자꾸 대하면서
좀 통을 키우고 액수도  늘리기로 했다. 
즉, 하루에 3 만원씩까지는 써도 된다고 
통크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본인의 남은 평생 매일 이렇게 사용한다해도 
연예인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 한 대 값도 
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연예인들은 스타이고 
스타들은 그런 돈이 있는데 
본인은 없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기는 하다. 


그런데 여하튼 사건 사고에 대한 보고를 듣다보면 
몇 백조 몇 십조의 피해액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마음이 쉽게 우울해지기 쉽다. 

그런데 이런 경우,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본다. 

따라 기뻐할 정말 가치있는 일이 무한하므로
이런 일을 찾아 따라 기뻐하는데
더 전념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사건 사고 내용은 안타까운 것이 사실이고,
그 피해액도 안타깝지만, 
그 손해액이 수백조원이라고 해도 사실은 
씹던 껌에 붙은 먼지 정도의 가치 밖에는 갖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과거 역사상 있었던 수많은 전쟁과 사건 사고 등과 같이
하나같이 자신에게 따라 복사해 넣지 않아야 마땅한 그런 세상의 일들은 
모두 씹다 버린 껌에 붙은 먼지보다도 못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마음에서 덜어내는 것이 
특히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가치 계산이 잘 이해가 안 되면,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자. 



불어 노래를 듣다보니, 
서부영화 노래를 듣게 된다. 






그런데 이런 서부영화에서
싸움을 벌이다 허무하게 총을 맞고 죽어가는 이가 
자신이라고 가정하고 

그 상황에서 
우주를 가득 채운 화폐액과 자신의 목숨을 가치저울의 양쪽에 올려 놓고 
이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숫자 계산을 해보면, 
앞과 같은 금액들은 
사실 씹던 껌에 붙은 먼지라고 표현해도 
상당히 부풀려 표현해 놓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한 달에 3 만원을 사용하는 것은 좀 지나치고 
앞으로는 하루에 3 만원까지 사용하는 것은 허용하기로 한다. 
부족하면 장차 사용할 연금을 미리 끌어 당겨서 사용하기로 한다. 
(탕 탕 ) 



서부영화를 생각하면, 
불란서 사람들은 사실은 서부영화의 
주인공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

유럽의 어느 특정 나라의 사람들만
신대륙에 진출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부영화의 주인공으로는 
영국이나 이탈리아 출신이 좀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블란서 사람들은 신대륙진출에서 
상대적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사실 따라 기뻐해야 할 일은
오히려 이런 부분이라고 본다. 

지금 발전된 미국의 모습을 보면 
부럽다고 여길만한 측면도 있지만, 
그러나 그 이전 모습에서 따라 기뻐해야 할 내용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디언을 학살하고 
흑인을 끌고와 학대하고 
형제들끼리 다투고 싸우고 죽이고  
이런 모습을 따라 기뻐하면
자신도 이런 행위를 쉽게 
따라 행하게 되기 쉽다. 

잘 닦아 놓은 도로를 
관광을 하며 차를 타고
지나 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길 닦는데 평생을 바치면 곤란한 것 아닌가. 


수행자의 수행도 사정이 같다. 

지금 주제는 복사해 붙이기인데 
수행자의 수행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다. 

복사해 붙이지 않아야 할 내용과 
복사해 붙여야 할 내용을 잘 구분해야 하고 

자신에게 복사해 붙여야 할 내용은 
빨리 복사해 붙이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따라 기뻐하면 안되고
또 자신에게 복사해 붙이면 안되는 내용인가. 

예를 들어 
세간에서 사건 사고로 
피해가 발생했다면 
어느 곳에서는 부당하게 이익을 보는 곳이 있게 된다. 

전화 등으로 사기를 쳐서 
수백억원의 수입을 얻거나, 
또는 가치없는 기업 등을
사기를 통해 수조원에 부풀려 
팔아 버린 쪽은 그런 막대한 이익을 보는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부당한 이익을 얻어
기뻐하는 입장을 따라 기뻐하면 
이후 대단히 삶이 곤란해지게 된다. 

그렇다고 반대로 이것을 자신 일처럼 여기며
매일 생각하고 속이 상한 채로 지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것이 문제는 분명 문제이지만, 
본래 수행자가 가치 저울로 이런 문제를 평가할 때는 
껌에 먼지가 하나 붙어 있어서 조금 좋지 않다는 정도로 
안타깝게 여기고 슬퍼할 일로 여기고 

그 대신 보다 가치있는 일에 집중하고 
보다 가치있는 일을 복사해 붙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보게 된다. 


아미타 부처님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바쳐서 
극락세계를 완성했다는 것이 
그런 일에 해당한다. 

수행자가 지금부터
원시인의 상태라고 가정하고 
불을 자신이 개발하고 
라이터도 자신이 개발하고 
자동차도 자신이 개발하고 
우주선도 자신이 개발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 
자신도 극락세계와 같은 세계를 하나 만들어 보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원래 인류가 처음 지구에서 활동한 후 
불을 사용하게 된 것은 300 만년 정도가 걸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략 3 만년전부터 불을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고 하고  
또 인류가 처음 보이는 시점은 300 만년 정도 된다고 하기에 
대략 생각해보는 시간이 그런 것이다.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라도 오늘 주변에서 보는 물건들을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을 정말 무인도같은 환경에서 
모두 자신이 직접 만들어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바라보자. 
자신이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이 가운데 
도대체 무엇무엇인가. 
옷은 하나 만들 수 있을까. 

이 옷을 만들기 위해서
흑인노예들이 끌려가
목화밭에서 채찍을 맞고 일하게 된 사정이 있었지만, 

여하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하나하나가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닫게 된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이미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이 
긴긴 시간 수행을 마쳐서 
후배 수행자들이 복사만 하면 
곧바로 그 내용을 얻어 가질 수 있게 만들어 놓았는데 

그 하나하나를 자신이 직접 다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하나하나가 300 만년 이상은 걸려야 된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자신이 수희 원요만 하면 
곧바로 그 내용이나 결과를 넘겨주는 것은 
수행자들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아미타부처님만 마음으로 념하면 
아미타부처님이 극락세계 사용권과 함께 
모든 수행결과를 쉽게 복사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은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부처님을 념하고
부처님과 보살님들의 사업을 생각하고
따라 기뻐하기만 하면 
무량한 복을 받고 그 결과를 받게 되는 것은 
수행자의 세계에서는 
원래 일반 세속과는 반대의 원리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일반 세속에서는 자신이 수십년 노력하여 이룬 성과를 
다른 이가 ctrl+ c 키만 눌러 복사해가면 
속이 상하고 화가 난다고 여기지만, 

수행자의 세계에서는
이를 정반대로 생각하고
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행자가 애써 닦아놓은 수행자도로가 있는데
후배 수행자들이 이를 외면하고 무시하고 
자신이 직접 하나하나 터널도 뚫고 길도 닦은 다음에 
그 길을 걸어가겠다고 결심하면 
상당히 안타깝게 여기고 가슴아파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 안타깝게 여기고 슬퍼해야 할 일도 많지만, 

반대로 선배 수행자들이 이룬 내용을 따라 기뻐하고
자신도 그런 상태가 되기 위해 서원을 일으키고 
즐거이 복사해 붙이기 활동을 시작해야 할 일도
무한히 많은 것이다. 



시감상 차원에서 노래를 들을 때는 
이 불어 노래를 부른 가수 이름도 잘 보아야 한다. 

이름이 싸울래.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을 우선 확인할 수 있다. 
시감상 방법으로 잘못 이해할까봐 곧바로 옆에 영어로 dusty man 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불어 노래엔 반면 스승의 노래,
즉 반대면을 따라 배워야 할 내용도 
많이 있다. 




○ [pt op tr] mus0fl--Charlie Winston - Saule - Dusty Men.l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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