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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휴게소]-2015_01월_05주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5. 1. 26. 08:07

[댓글휴게소]-2015_01월_05주

10gfl--2015-01월_댓글보전.txt
http://story007.tistory.com/1024



◈Lab value 불기2559/01/30/금/22:58


♥ 잡담 ♥갈애의 삶

삶은 부정하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는 갈애가 있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생계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채워지지 않는 갈애를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게 된다. 

담배가 떨어져 집중이 잘 안되고 
글을 쓰고 픈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파이프 담배 잎이 조금 남아 있는 것을 보고 
파이프에 넣어 조금 피우게 된다. 

조금 낫다. ^_^

채워지지 않지만, 그러나 갈구하는 많은 것이 
마음에 남아 있음을 느낀다. 


막상 보고 듣는다 해도
별 것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보고 듣고 싶은 것이 있다. 

삶에서는 간절히 원했지만, 
실현되지 않는 일들도 많다. 

하루 종일 같은 주제만 놓고 생각한다. 

왜 little 님은 연구활동이 주로 잠인가 하고 묻지만, 
오래 앉아 있으면 발이 저리게 된다. 
발이 저리면 일어서지도 못하고 
발을 편하게 하기 위해 눕게 된다. 
눕다 보면 잠을 자고 
잠을 자다 보면 꿈을 꾼다. 

꿈속에서 연구를 진행하게 된다. 
물론 결론은 늘 같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집착을 다 버린다지만, 
생명과 신체, 이런 부분에서 집착이 남게 되고 
이에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 
결국 마찬가지가 된다. 

little 님이 삶의 고통스런 모습을 말하지만, 
이는 수많은 생명이 겪는 고통 가운데 
극히 일부의 고통이다. 

수많은 생명이 바로 이 생명에 대한 집착을 바탕으로 
생존과 생계유지 그리고 각종 갈애의 추구에 이끌려 
고통의 현장으로 나아간다. 

탈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찾아낸 탈출구는 그러나 너무 극단에 있다. 


오늘은 이런 생각을 했다. 

담배를 하나 사서 다시 피우는 것처럼 
현실의 갈애를 쫒아 나가는 것은 쉽다. 
그렇게 갈증을 일으키는 갈애를 쫒아나가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러나 그 자그마한 경계에서 
그렇게 끌려 나아가지 않고 머무는 것이 
힘든 일 같다. 

하루 종일 멍하다 .

중독증세에서 풀려 나오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꿈을 꾸는데도 비슷한 꿈을 꾼다. 
손만 내밀면 잡힐 것 같고 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잡히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런 꿈을 꾸게 된다. 
꿈을 깨고 나서도 무척 아쉽다. 

모두 시간에 묻혀 사라질 일인데 
도무지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삶에서 실현되지 않았던 
온갖 갈애들은 
무언가 아련한 상처들을 
남겨 주는가.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지 않는 상태에서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될 때 
평안함을 주는 것인가. 

그런 오락가락한 마음상태가 된다. 


꿈에서 
wolle 란 이상한 독일 단어를 보고 
무슨 의미인가 찾아본다.
원했다란 의미라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XINh1P1L0qA

>>>

Education Sentimentale, Maxime Leforestier

>>>




○ [pt op tr]  Education Sentimentale, Maxime Leforestier  가사




문서정보

 


 

◈Prince evilstupidmiserable Little 2015/01/30/금/08:21


♥ 잡담 ♥현실이 계속되어야 할 이유


TV 에서 여러 내용을 보았다. 

우선 아프리카 이디오피아의 가난한 가족의 상황을 보게 된다. 
30 세 어머니는 4 명의 아이를 갖고 있다. 
큰 아이는 10 살 남짓해 보이고 갓난 아이까지 있다. 
집은 짓다 말은 초가집 비와 바람을 제대로 막아 주지 못한다. 
아이들이 앉아 있으면 온통 파리가 얼굴 등을 뒤 덮는다. 
땔감을 모아 끼니를 잇고 산다. 겨우 옥수수 가루를 사와 
페인트 통 같은 곳에 넣고 갠 다음 
옥수수 빵 비슷한 것을 만들어 먹는 모습을 보게 된다. 




[사진- 이디오피아]

한편 네덜란드의 상황을 TV로 보게 된다. 
우선 바다를 막아 해수면 높이 보다 낮은 땅에서 산다. 
과거엔 풍차로 물을 퍼 내보냈다고 한다. 
사람들은 요트나 보트 자전거 등을 타고 
여가를 보내는 모습이 풍요롭고 여유롭게 보인다. 

[사진- 네덜란드]

자연 풍광 자체는 이디오피아나 네덜란드나 다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살아가는 물질 환경이 너무 다르다. 
이런 두 대조적인 모습에서 
아프리카의 열악한 모습을 좋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같은 선진국의 풍요로운 환경에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lab 님 말대로 무언가 부족하고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우선 생노병사의 문제는 어느 곳이나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가난하고 열악한 상황에서 물론 풍요로운 생활을 바라는 것이지만, 
그러나 단지 풍요롭게 산다는 것만으로는 
삶의 허무함이나 무의미함을 생각하게 된다. 




이런 문제를 놓고 
우선 물질적 환경의 개선과 풍요도 얻고 
또 생노병사 등의 문제를 해결하면 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또는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한다면, 
어느 것을 우선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가 있다고 본다.

더 나아가 생노병사 문제의 해결은 본질적인 문제고,
물질 환경 개선 풍요 등은 다만 
방편적인 문제로 
선악 무기의 성격을 갖는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심지어 눈을 바꾸면 
더럽게 보이는 것들이
모두 깨끗하고 좋은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상태가 
둘 가운데 어느 것인가 
이런 문제도 제기된다고 본다. 

이런 문제가 알쏭달쏭한 문제라고 본다. 


 >>>

 Guillaume Cantillon - Des Ballons Rouges

 >>>

 https://www.youtube.com/watch?v=7vIkr-aqo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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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Guillaume Cantillon - Des Ballons Rouges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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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ce evilstupidmiserable Little 2015/01/29/목/21:25


♥ 잡담 ♥망상분별의 필요성 

lab 님은 보시를 말하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지극히 인색하다. 



수행을 말하지만,
그 수행의 대부분은
또 잠이라고 보여진다. 

이런 상태에서 lab님의 표현에 의하면 망상분별, 
본인의 입장에 의하면 지극히 정상적이고 표준적인 상식에 의거하여 
일일히 반론을 제기하지 않으면, 

lab 님 스스로 
지극히 심심하고 무료하여 할 일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되고 말 것이다. 

유마힐소설경에 일체 중생이 병들어 있으므로
보살이 병들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지만, 
정말 중생들이 병들어 있지 않다면, 
보살은 얼마나 심심하고 무료해 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중생의 병은 또 쓸모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보살들이 끊임없이 수행하고 노력한다해도 
현실에서는 어떤 견해를 갖는 이가 더 많고 
어떠한 입장이 더 표준적이고 정상적이라고 인정하게 되는가. 

당연히 lab 님의 제시하는 이상한 입장을 오히려
문제라고 보게 된다. 

하지만, lab 님 스스로 남의 문제나 병을 고친다고 나서면서, 
lab님 자신도 자신의 문제를 조금씩 고쳐나가고
심심해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다행이라고 본다. 




>>>

Images - Corps A Corps (1987)

>>>

https://www.youtube.com/watch?v=dUXWmUDXLYA

>>>






○ [pt op tr] Images - Corps A Corps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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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 value 2015/01/29/목/14:46


♥ 잡담 ♥현실과 담배 





little 님과 doctr 님의 글에 대하여 
답글을 다느라 긴 글을 올리고 말았다. 



mun 님이 사다 놓은 혈압계를 그간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오늘 한 번 재보았다. 
상당히 높게 나온다. 

little 님이나 mun 님이 제기하는 문제를 
살펴보려면 
담배를 피워야 하는데 

또 한편 조금이라도 건강한 상태로 
이들 문제를 대하고 살펴 보려면, 
또 담배를 끊고 
운동도 열심히 하는 가운데 
임해야 할 것도 같고 

오락가락한다. 

그런 가운데 최후의 담배 1 개피마저 사라져 버렸다. 

시장에 나가서 열쇠도 고쳐 가지고 오고 
고장난 시설도 고쳐야 하고 
현실에서 문제는 속출한다. 

그래도 이런 사소한 문제를 문제라고 여기고 
살아가는 상태가 그나마 행복한 상태라는 사실을 
각종 사건 사고 보도가 알려주기는 한다. 



이는 little 님이 말하는 거북도사의 효과라고 할만하다. 

각종 문제상황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본래 없던 상황에 대해 고마움과 감사를 느끼게 하는 것이
little 님이 말하는 거북도사가
사람들이 현실이 갖는 가치에 대해 재평가하게 하고
감사와 행복을 얻게 만드는 주된 방법이기 때문이다. 

little 님이 사실 망상분별증세에서 빨리 벗어나야 하는데 
증상을 물어 보면 
정작 그 망상에서 벗어나면 
심심하고 할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수행자가 이론적으로
수행을 통해 얻게 될 상태에 대해 갖는 의문점도 
사실 이와 깊이 관련된다고 본다.  


현실에서 
일체의 감각 인식과 관련된 내용과  
망상분별 등을 제거하면 
근본정신과 함께 깜깜 무식함이나 막막함 외에
무엇이 남아 있게 될 것인가. 
이런 것이 현실의 망상 분별에 집착한 상태에서 
갖는 기본적 의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선배 수행자나 
부처님 보살은 그것을 일종의 기우라고 제시하는 것 같다. 

원래 망상분별과 혼탁한 내용들이 현실에서 제거되고 
가라앉아야 
비로소 그 안에 올바른 깨달음 등이 
맺히게 된다는 내용을
반대로 제시하는 것이다. 



mun 님이 만나보기 위해 훈련 중이라는 
아름다운 여인 초선과 이생희락도 
그런 내용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만나보기 전에는 잘 알 수 없는 그런 여인이다. 

little 님이 
1 시간 후면 다시 나타나
또 다른 망상적 내용을 문제로 제기할 예정인데
그 전에 서둘러 해야 할 일이 있다.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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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 value 불기2559/01/29/목/09:07


♥ 잡담 ♥실재와 삶의 고통 문제 

doctr 님이


little 님이 앞에 제시한 의문과 같은 형태로 

실재의 정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단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현실을 대하면서 이 현실이 무엇인가,
그것이 실재인가,
또한 영원불변한 실체가 있는 진짜의 내용인가 등의 논의는  
무슨 이유로 어디에서부터 논의가 출발하게 되는가 하는 점을
확인해야 한다고 본다.  

현실에서 대하는 내용을 
그것은 환영과 같고 꿈같은 내용이어서 
실재가 아니고 또한 진짜가 아니지만
마치 진짜인 것처럼 나타나고 사라지는 실답지 않은 내용이라고 하던, 


아니면 현실 내용 자체가 실재라고 하던, 
아니면 현실 내용이 실재 자체는 아니지만, 실재 역시도 이와 일치하는 같은 내용이라고 하거나, 
실재는 현실내용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에 비례하고 유사한 내용이라고 하거나, 

이런 여러 판단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부터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는 공허하게 
어떤 것의 참된 정체가 무엇인가를 문제삼고 
또 무엇이 실재인가 또는 진짜인가 등을 문제삼고 
실재의 내용만 얻어 내면 깨달음을 얻은 것이어서
무엇이던지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며, 
실재의 내용을 알거나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왜 그것이 결국 문제되는가. 


현실에서는 자신이 자신으로 보는 내용이 있고 
이것이 언젠가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늙고 병들고 
허물어져 죽어 사라짐을 알고 이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또 그런 현실을 당하여
자신의 신체가 병들고 훼손되면 
지극히 고통을 느끼게 되며, 

또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갖는
여러 다양한 희망이 자신의 뜻처럼 실현되지 않을 때에도
역시 다양한 번뇌와 함께 고통을 받는 상태에 노출된다. 

이는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도 그러하고 

또 한편, 자신이나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생명, 신체, 재산, 가족, 지위, 명예...등과 관련하여 
다양한 고통을 받게 하는 여러 악행을 행하고 
또 그 결과 자신과 다른 생명이 함께 고통을 받게 되는
상태에도 노출된다. 

현실에서 보고받는 다양한 범죄 사건들이 이에 해당한다. 

문제라면 삶에서 만나게 되는 이런 측면들이 문제인 것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런 고통과 이 고통의 근본이 되는 자신과 세계의 정체에 
대해 논의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즉 그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는 것은 
이런 문제의식과 함께 제기되는 논의인 것이다. 


이런 내용은 이미 잡아함경 해설 부분에서 
좀 더 자세히 체계적으로 논의했다고 본다.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위 그림은 다음과 같은 실험의 상황이다. 
1 은 2 가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는 가운데 그가 얻는 내용과 변화를
1 자신에게 보고하게 하면서
다른 사람 2 가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과정을 1 이라는 사람이 관찰한다. 


그 때 1 은 2 가 얻게 되는 모든 내용은 2 의 머리 (마음) 안에
위와 같은 형태 (5^)로 맺히게 되리라 추리한다. 

이것이 물론 잘못된 추리임을
위 글에서 말하게 되지만, 
일단 우리가 볼 때는 
예를 들어 2 가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는 가운데 
무엇인가가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 하는 변화는 
오직 2 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2 의 부분에서 그런 변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2 가 그 마음에서 현실 내용을 얻을 때 그 순간 적어도 
그와는 별도로 그 외부에 그것을 얻게 한 무언가가 
별개로 있을 것이라는 추리를 우선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실재의 내용에 대한 추리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는 굳이 2 라는 다른 사람을 관찰하지 않아도 
자신 혼자 자신의 인식과정을 관찰해도 사정이 비슷하다. 

자신이 눈을 뜨면 어떤 모습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사라짐을 반복해 경험할 때 
자신이 눈을 뜰 때 보게 된 모습은 
눈을 감을 때는 세계에서 사라져 완전히 없어진 것인가. 

아니면 눈을 감더라도 자신이 보고 못보고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이와 관계없이 그대로 실재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할 것인가. 

또 눈을 떠 모습을 보는 순간에도
이 내용과는 별개로
이런 내용을 얻게 한 어떤 실재의 내용이 
그 외부에 있다고 할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실재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논의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또 이것은 우리가 얻는 현실 내용의 실재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기도 하다. 


이런 여러 실험의 결과, 
우리가 대하는 현실 내용 그 모두는 
사실은 우리의 마음 안에 맺힌 내용이며 

이들 내용은 사실은 우리의 정신(식)일 뿐이며 
여기에는 우리가 외부의 실재대상으로 보는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유식무경]
이라고 하고,
 
한편 우리의 마음의 위치는
우리가 우리의 몸으로 보는 그런 부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게 되는데
이런 논의도 
또 이런 바탕에서 전개되는 내용이라고 본다. 
[ 참조 수능엄경 ] 



한편 불을 놓고
정상적으로 이들 감각기관을 모두 갖는 little 님이 
각기 눈, 귀, 코,...등  각 감각기관을 하나씩만 갖고 있는 5 인의 sam을 초대하여 
함께 불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문제를 보았는데 
이러한 관찰도 바로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에 놓고 전개되는 논의이다. 

우리는 다시 sam 과 little 님이 행하는 판단을 위와 같은 형태로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이들에 대해 행하는 판단도
역시 같은 형식으로 다시 반성하여 검토하게 되는 것이다. 

[IMG2--15] http://buddhism007.tistory.com/691 ☞● 불의 정체의 실험

08pfl--image/불의정체-실험.jpg



[img2--01]

08pfl--image/존재의_영역_설명.png


그런 가운데 
존재성과 그 진실성이 문제되는 다양한 영역의 내용을 위 그림같이
나열하여 놓고
이들간의 상호관계를 살피는 문제도 
이런 바탕에서 논의되는 것이다. 

하나의 내용을 빼거나 넣거나 할 때 
다른 내용은 어떤 변화를 보이는가. 
또 그 반대는 또 어떠한가 
이런 관찰을 통해 
이들 각각의 상호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문제삼고 살피는 것이다. 





이처럼 논의가 복잡해지지만,
이 모든 논의는 사실은 
우리가 고통을 받게 되는 현실 문제와 
깊게 관련이 되어 있다. 

우리가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 
그리고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내용을 놓고 

여기에 대해 집착을 갖는 상태에서 

이런 내용들이 뜻과 달리 얻어지지 않거나, 
또는 그 반대로 뜻과 다른 원치 않는 내용이 얻어질 때 
또는 얻게 된 내용을 좋다고 보고 이에 강하게 집착함에도
그것들이 뜻과 달리 무너지고 파괴되고 사라지게 될 때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인데, 

결국 이 근원에는 자신이 집착을 갖고 대하는 
자신(나)와 자신의 것(나의 것)이라고 보는 내용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 
그 가장 기초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만 간단히 말한다면, 
현실에서 대다수가 고통에 노출되고 
또 자신과 다른 생명을 고통스런 상태로 이끌고 가는 악을 행하게 되는 
가장 기본 바탕에는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망상적인 전도된 (잘못되어 뒤바뀐 ) 분별 판단과 함께 
이에 바탕하여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 사견을 일으켜 이에 바탕하여 집착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하여 뜻과 말과 행위, 태도, 자세를 취해 나가고 
그로 인해 계속 고통의 결과를 만나면서
반복해 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내용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망상분별 번뇌 집착(혹)  -> 뜻, 말, 행위(업) -> 3 계 6 도의 고통의 윤회(고)
의 관계인 것이다. 

이는 little 님이 현실에서 매우 정연하고 익숙한 형태로 반복된다고 
보는 현실 내용이
사실은 바로 이런 상태의 내용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앞글에서 담배나 술, 차...등등에 중독된 이가 그것을 끊지 못할 때 
그로 인해 각종 부작용에 노출됨을 말했는데, 
그것도 결국 같은 과정이다. 

그러나 이에 중독되지 않은 이가 이런 상태를 볼 때는
이를 무엇이라고 보게 되는가. 

그런 것에 중독을 일으켜 갖지 않거나
가졌더라도 그 중독을 끊고 벗어나면 
적어도 그런 피해는 보지 않을 것인가
그렇게 단순하게 말하게 된다. 

그러나 중독된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 중독현상에서 벗어나 평안하게 된다는 것이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닌 것이다. 

지금 개인적으로 담배가 5 개피만 남아 있어서 
이것이 다 떨어지면 앞으로 어떡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보게 되는데 

그럼에도 역시 중독되지 않은 입장에서는 
이런 문제현상에 대해 왜 스스로
끊고 벗어나지 못하는가 한심하다라고 생각하며 
의아하게 여길 수 있다. 

결국 부처님 보살들이 현실에서 
고통받는 중생의 상태에 대해서 
그 원인을 살피면서 이 관계를 살필 때, 
이들이 왜 고통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고 
계속 고통에서 또 다른 고통으로 나아가는가 하는 점을 놓고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바라보는 측면도  
사실은 이와 유사하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doctr 님이나 mun님은
본인의 담배 중독현상에 대해 하는 변명에 대해 
가증스럽다고 여기겠지만, 
doctr 님이 제시한 유마힐소설경에는 
이런 취지와 같은 말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

유마힐소설경에도  
수행자가 병이 들고 아픈 것은 
중생이 병이 들고 아프기 때문이다. 
라는 취지의 말씀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

유마힐이 말했다. 


"어리석음[痴]과 탐심[有愛]으로부터 나의 병은 생겼습니다.

일체 중생이 병들어 있으므로 

나도 병들었습니다. 

만약 일체 중생의 병이 사라진다면 

그 때 나의 병도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 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해 생사(生死)에 들어섰으니, 


생사가 있는 곳에 병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중생이 병에서 떠난다면 

보살도 병이 없을 것입니다.

...

fr k0119sf-- ☞일체 중생이 병들어 있으므로

왜 수행자가 담배 하나를 끊지 않거나 끊지 못하는가. 

그것은 중생이 번뇌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본인도 이런 변명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_^

만약 중생이 모든 병과 번뇌와 고통에서 떠난다면 

나도 담배를 끊으리라, 


웃기시네





여하튼 현실과 실재에 대한 논의에서는
다음의 내용을 우선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신이 집착을 강하게 갖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것의 
정체가 정말 무엇인가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이에 대한 답을 추구할 때 
현실에서 갖는 온갖 망상 분별을 갖고 이를 해석해나가게 된다. 

그 견해를 나열하자면 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견해는 단순히 공허한 이론적 논의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곧 그에 바탕한 행위를 일으키고 
그것은 또 다른 고통의 결과에 자신을 
밀어 뜨리는 훌륭한 기능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사실은 금이 전혀 묻혀져 있지 않다고 하자. 
그러나 어느날 어떤 지도하나를 얻고 
그 밑에 금이 묻어 있다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되면, 
그는 이후 열심히 땅을 파나게 된다. 
죽을 때까지 그 신념으로 파고 또 파는 것이다. 

이런 현실과 같다. 

자신이 어떤 신의 대리인이라고 생각하고 
신이 자신에게 어떤 것을 실현하기를 원한다라고 생각하면 
그에 따라 축구를 보는 이를 체포하여 사살하기도 하고 
멀쩡한 외국인을 체포해 목을 칼로 자르기도 하는 것이다. 

다른 이는 또 그렇지 않은가. 

오십보 백보의 차이일 뿐 
사정이 다 마찬가지라고 보는 것이다. 

사실은 유대인의 피가 섞인 것으로 보고되는 한 오스트리아 청년 
히틀러라는 이가 
아리안 인종의 순수성을 내걸고 
유태인을 학살하는 과정에도 
사실은 이런 망상 분별이 전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증거가 명확하지 않으면 
과거에 부녀자를 납치해 전쟁터로 끌고 다니면서
괴롭힌 일은 일체 없는 것이고 
있다해도 자신들의 잘못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다 사정이 같다고 본다. 

그러나 한편 이들도 또한 수백만 수천만이나 되는 이들이  
각기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전쟁터에서 고통을 당하며 죽어갔던 것이고 
또 그들의 수많은 가족들도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한 것이다.  

이처럼 현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 사고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평범한 이들이 행해 나가는 현실 생활 일체가
사실은 이처럼 
각 생명이 행하는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같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처음 대부분의 상식적인 입장을 놓고 보면 
대부분은 자신이 현실에서 감각해 얻는 내용을 놓고 
그것을 또 외부의 대상이며 자신의 내용이라고 여기고 
또 그 내용 그대로 진짜이고 실재라고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더욱이 이 정체에 대해 살필 때
이런 내용과 별도로
실재라는 관념 자체도 갖지 않고  
실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 의식 자체를 갖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대부분의 상태라고 보아야 한다. 

현실에서 자신과 세계의 내용을 얻을 때 
이를 얻게 하는 실재가
적어도 이런 현실 내용과는 별도로 있다고 추리하고 
그 실재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의식은 

적어도 현실의 정체에 대해 
조금은 깊이 생각할 때 갖게 되는 
문제의식인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현실내용을 놓고
그 실재의 정체가 무엇인가 문제삼는 바탕에서
이에 관한 여러 다양한 견해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바탕에서 이 실재가 무엇인가 문제삼을 때, 
이에 대해 가장 간단히 
현실에서 A라는 모습을 얻고 그에 대해 a 라는 생각을 하면, 
그 A나 a가 모두 그 자체로 실재이고 진짜다. 
이런 것을 가장 소박하고 단순한 현실 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 상식적 입장과 거의 같은 내용을 
그대로 실재의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앞과 같은 여러 실험과 반성을 통해 
그것은 자신의 마음 안에 얻어진 내용들이며,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실재는 
별도로 있다고 추리하게 되면 
이제 비로소 현실 내용과 실재의 관계에 대해
이와는 차이나는 다른 내용을 제시하게 된다. 

적어도 많은 철학자들은 
이런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현실에서 대하는 많은 내용의 정확한 정체에 대한 
탐구 연구활동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입장에서 
물론 little 님과 doctr 님처럼 
그 실재는 사실 현실내용과 일치하거나, 
적어도 비례하거나 그와 유사한 내용일 것이다라는 
주장이 제기된다고 본다. 

그런데 이는 일단 
현실 내용 그 자체가 실재다 라는 입장과는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

사과와 함께 그 외부에 따로 상자가 하나 있는데 
그 상자 안에도 사과와 일치한 내용이 있다. 
아니면 사과와 유사한 내용이 들어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과 

사과 밖에 그런 상자 따위는 따로 없고 
사과 그 자체가 사과다. (그 사과가 그 사과의 실재 그 자체다)
이런 입장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놓고 
그와는 별도로 있는 실재가 따로 추리되고 

그 바탕에서 다시 
그 실재는 현실에서 얻는 내용과 일치하는 내용이라고 하거나,
또는 현실에서 얻는 내용과 비례하거나 유사한 내용이라고 하는
입장은
처음의 일반적 상식적 입장과는 적어도
차이가 있다는 의미다.  


반야심경에서 이렇게 추리되는 실재의 내용에 대해 
그것을 공하다고 제시하는 가운데 

우리가 대하는 현실 내용(색,수,상,행,식)과의 관계를 
제시하는 것은 
적어도 기본적으로 이런 입장에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대반야바라밀다경에는 이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는 것이다. 

우선 실재와 현실내용의 관계는 
적어도 실재는 현실 내용 그 자체는 아니고,
현실 내용도 실재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현실 내용은 실재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실재도 현실내용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색불이(不離)공 공불이(不離)색] . 


그리고 나서 반야심경에서 제시되는 내용과 같은 내용이 
다시 제시되는 것이다. 

즉 이런 바탕에서 
색불이(不異)공 공불이(不異)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여부여시 

...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
공중 무색 무수상행식...
...
이렇게 제시하는 것이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
fr k0020sf-- ☞사리자 색불이공



결국 이런 반야심경의 내용은 
실재와 현실 내용의 상호관계를 압축해 제시하는 내용이 된다고 본다. 

실재와 현실내용은 일단 분리되어 그 정체가 추구되지만, 
실재와 현실내용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들은 곧 다르지 않고 이것이 이것이다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나 또 한편 실재에는 그런 현실내용(색수상행식..등)은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의미에서 
공중'무'색 '무'수상행식...등과 같이 '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왜 공한 실재는 유무 분별을 떠나고 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여기에서는 무라고 단정지어 표현하는가에만 걸리지 않는다면 
이 무라는 표현에 대해 크게 문제삼을 것은 아니라고 본다. 

중생들이 실재 안에도
현실에서 얻는 내용으로서 색수상행식이 그대로 있는 것이라고 
분별하고 집착하기에 
그런 망상분별을 벗어나게 하고 그런 집착을 끊게 하기 위하여 
간단히 무라고 표현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공한 실재는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이라고 
중생들이 잘못 분별하여 집착을 일으켜 갖는 경우에는 
또 다시 그런 잘못된 분별을 끊고 벗어나게 하기 위해
오히려 유라고 표현하거나 상락아정 등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경전에서 사용하는 세속제적 표현과 승의제적 표현은
본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 대해서도 
각기 그렇게 언어를 통해 표현하게 되는 취지가 따로 있는 것이므로
이런 표현에 대해 세속제적 의미와 승의제적 의미 사이에서 
의미 혼동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런 표현에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게 된다고 본다. 

우리가 얻는 현실 일체 내용은 
사실은 자신의 식(정신적내용)이며 
그 안에 처음 우리가 자신의 외부 대상이라고 본 그런 
외부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유식무경이라고 표현한다. 

일반 상식적인 입장에서는 
자신이 눈을 떠 사과나 꽃을 보면 
그 모습이 곧 자신 외부에 있는 외부 대상이라고
잘못 생각하며 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유식무경이란 표현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이런 내용을 대하여 
사람들은 또 수많은 망상분별을 일으켜 갖게끔 된다. 

혹자는 이런 내용을 기초로
자신이 본 세계나 다른 이들의 모습은 
모두 자신의 정신의 내용이므로, 
세상에는 오로지 자신의 정신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고 
이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를 독아론(獨我論) 또는 유아론(唯我論/Solipsism)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유식무경의 무경에 의미에 대해
잘못된 확장해석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대하는 현실 내용에 
원래 일반인들이 그 안에 있다고 보던 외부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유식'무경'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이를 가지고 일체는 단지 식뿐이고
일체 외부 대상(타인이나 세계의 실재)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이들 현실 내용에 다른 정신 작용의 대상이 되는 내용
또한 역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확장해석하는 데에서 이런 오류가 나타난다고 본다. 

이런 망상분별을 가지고 현실에 임하면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위해나갈 것인가. 

다른 사람이나 어떤 물건을 대할 때에도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마음 안 내용일 뿐이라고 여기고 ( 이는 일면 사실이지만, ) 
그것을 함부로 해쳐도 관계없고 함부로 취해 가져도 
관계없다고 여길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자신의 정신안 내용물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는 일체가 공하고 나와 나의 것이 없다는 가르침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아무렇게 행해도 무방하다며  
막행 막식하는 악취공견을 일으키는 것도 
또 다른 잘못이 된다. 

망상분별이 잘못된 행위를 불러 일으키고
잘못된 결과로 이끄는 과정은 여기에도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대하는 현상이 
사실은 모두 자신의 식(정신, 정신작용, 정신내용)일 뿐이다
그 안에 우리가 외부대상이라고 본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체가 공하다는 내용 등은 옳다고 보지만,
이 내용에 대해서도 그 의미를 올바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적어도 앞과 같은 의미는 아닌 것이다. 


little 님과 doctr 님은 





이렇게 문제되는 실재 내용은 정작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고 [불가득]
또한 여러 이분법상의 분별을 행할 수 없고 [불이]
따라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언어도단]이니, 

실재에 대해 설령 
그것은 현실내용과 일치하는 내용이라거나, 
비례하고 유사한 내용이라고 주장한다해도 
그것을 단정적으로 부정하고 배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라고 
반론을 제기한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다. 
공한 실재는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과 같다 ~과 다르다. 좋다 나쁘다. 깨끗하다 더럽다...등등의 
모든 분별을 행할 수 없는 것이므로 
적극적으로 주장되는 'A'라는 주장에 대해
그것이 아니다 없다. 다르다. 이런 식으로 단정지어 
배척할 수 있는 힘을 갖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런 상태임을 아는 이가 
단지 어떤 주장을 단정적으로 배척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왜 굳이 그런 억지 주장을 제시하는가. 

그것은 앞과 같은 사정을 바탕으로 할 때에도
역시 문제라고 본다. 

사람들이 일반적인 상태에서 
망상분별에 중독되어 
잘못된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에 바탕하여 집착을 일으키고 
뜻과 말과 행위를 행하고 
이로 인해 고통의 3계 6도 윤회를 무한히 받아 나감을 
문제로 보는 것인데 



그것은 사실 little 님이 제시한 것처럼 
현실 내용이 그 망상 분별 속에서는 
매우 정연하고 익숙한 형태로 반복제시되기에 
그것이 그대로 실다운 내용이라고 분별하고 
그에 집착하는 것이 가장 근본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과 보살은 
이런 망상분별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 
실재와 관한 내용과 함께 
올바른 깨달음을 통해서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앞과 같은 사정을 기초로 
스스로 그런 주장을 단정할 근거를 하나도 얻지 못함을 알면서도 
또 자신이 설령 억지 주장을 해도
실재와 관련해서는 그것을 배척할 근거 또한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자신이 현실의 망상분별 속에서 얻는 내용이
그대로 실재의 내용이라거나,
또는 그와 비례하거나 유사한 내용이라고 주장하고

그렇게 설령 주장하면 또 어떠한가라고 하는 식으로 
무책임한 주장을 제시하는가. 

이것은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그 망상분별을 더 강화시켜 나가자는 취지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비록 실재를 직접 얻지 못하지만, 

현상 안의 내용만을 놓고 이들 관계를 살핀다해도
이들 내용은 
서로간에 그 내용을 관통시켜 주장하고 
적용할 근거를 얻지 못함을 볼 수 있다. 

즉, 
각 감각기관으로 얻는 감각현실의 내용과 
관념, 느낌 등의 여러 내용 사이에서도 
그 각각의 내용은 
다른 영역에 그 내용을 그대로 관통시켜 
적용할 수 없음을 살필 수 있다. 

이미 얻고 있는 현실 내용 안에서도 사정이 그런데,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는 실재에 대해 
무엇을 근거로 그렇다라고 주장하고자 하는가. 
이렇게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눈으로 파란 색을 본 이가 
귀만 가지고 대하는 sam과 그의 정신 영역에 
그런 파란 색의 내용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또는 그런 파란색의 내용이 실재내용으로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사실 그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엉터리 주장이 되고 만다. 

사정이 사실은 위와 같음을 인식해야 한다. 

아무리 눈을 갖고 대하는 sam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보고 얻는 내용과
그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이 
실다운 내용이라고 분별하고 강하게 집착하더라도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little 님은 이제 눈, 귀, 코...등도 있어서 
이들 감각기관을 통해 얻는 모든 감각현실을 다 합쳐 
실재는 그런 내용과 일치하거나 비례하는 그 무엇이고  
실재가 그런 형태로 존재하기에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지만, 

그것을 다 합쳐 뭉쳐 놓아도, 
실재와 감각현실 그리고 관념 사이에는 
그것을 관통시켜 이 모두에 적용하고 주장할 
내용은 끝내 얻어지지 않고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다들 
자신이 눈으로 어떤 모습을 보고 
그것을 꽃이라고 생각하고 
매번 볼 때마다 역시 익숙하고 정연하게 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그런 현실 사정을 근거로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인식상태가 
반야심경에서 제시하는 
전도 몽상의 분별상태인 것이다. 



실제로 현실에서 망상증세에 시달리는 이는 
그 망상증세가 아주 일시적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망상증 환자는 수십년 또는 평생을 통해
그런 망상을 지속해서 일으켜 갖고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망상증 병자의 상황과
일반인이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행하는 분별은 
그 근본 사정이 같다. 

그 감각현실에 본래 없는 내용을 
분별해 일으켜 가진 다음 
그 내용이 이 감각현실에나 실재에 있다고 고집해 나가는 것은 
이 둘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것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서는
이들 모두가 바로 이들 망상분별 상태에서 얻은 내용을 가지고 
이것을 살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과 그에 대한 집착이 
곧 현실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고통과 악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지 않다면 
그런 망상을 갖고 살던 그렇지 않던,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하겠는가. 

어떤 현실내용을 놓고 그것이 곧
실재의 내용이라고 주장하던 않던 
각자의 자유에 맡길 뿐이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보는 이는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그런 주장을 한 것이고 
또 그런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고통을 향해 나아가고 
또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사실이 본래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킨 이는 
그로 인해 그런 고통과 악을 받게 되므로 
이것을 문제로 보고 

사실이 그렇지 않음을 깨닫고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기본적으로 중요하다고 
부처님이 가르치시는 것이다. 

부처님과 보살님이 
각 생명들이 현실에서 진짜라고 생각하며 대하는 내용들은 
하나 같이 진짜가 아니고 
그 실재는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기에,
따라서 공하다라고 표현한다. 

또한 그 실재나, 또는 현실에서 얻는  현상 내용이거나, 
그 안에는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진짜의 내용이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꿈에서 꾸는 꿈내용이
꿈 속에서는 있지만, 
그러나 꿈을 깨면 얻지 못하게 되는 일시적 내용이기에 
꿈 내용을 꿈 안에는 있지만,
그러나 진짜가 아니라고 하듯, 

현실에서 각 생명이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이나, 
그것을 얻게 한 바탕이라고 보는 실재 내용이나, 
그 안에는 영원불변한 실체로서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기에 
진짜로서 나나 나의 것은 여기에는 전혀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무아, 무자성, 인무아, 법무아, 승의무자성]

현실에서 온갖 내용을 얻고 망상분별을 일으켜 
정연하고 익숙한 형태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런 사실을 가르치는 것은 
바로 앞과 같은 문제상황에서 또는 망상분별의 중독 상태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little 님이 말한 것처럼 
현실에서 익숙하게 정연한 형태로
반복해 얻는다고 보는  
감각현실이나 관념의 내용을  
살아가는 동안 전혀 얻지 못한다거나, 
그런 것이 전혀 없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내용이 그 영역에 그렇게 얻어지지만, 
그것들은 하나 같이
집착을 가질 만한 진짜의 내용도 아니고 
또한 그 바탕이 되는 실재의 내용도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실재의 내용은 또 전혀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해 
이분법상의 분별을 행할 수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공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갖는 관념은
감각현실과 같은 자상이 그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감각현실에서도
그런 관념과 같은 내용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현실내용에서 보는 자신과 세계의 내용에 대해  
그것이 나타나고 변화하다가 사라져서
그 안에 그런 변화와 생멸
즉 생노병사가 다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망상분별과는 관계없이 
그 안에 생멸, 생사 등의 그런 내용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또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모습은 
사실은 자신의 정신이 얻어낸 일시적인 모습일 뿐이고 
그 일체는 식일 뿐이고 
그 안에 자신이 자신 외부의 대상이라고 본 내용은 없는 것이다. [유식무경]

한편 이처럼 자신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본 내용이나 
외부대상이라고 보았던 이런 모습들이 나타나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과 관계없이 
자신의 근본 정신(아뢰야식)은 무한히 유지되어 나가는 것이지만,  

그러나 또 한편 여기에도
진짜의 자신은 없는 것이다[무아]라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실에서 얻는 일체 내용은
현실에서 그처럼 얻고 그렇게 생각하기에
그런 영역과 차원에서는
역시 그런 내용들이 그처럼 있다고는 하지만, 

역시 앞과 같은 사유로 
그것들은 본래 실다운 내용이 아니고, 
실다운 진짜의 내용은 없다고 밝히는 것이고 

따라서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은 비록 그렇게 얻지만, 
이것들은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깨닫고 
그에 대해 집착을 갖지 말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그것이 곧 기존에 익숙하게 반복되어 받던 
고통과 문제에서 벗어나는 첫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즉, 바로 이런 올바른 깨달음을 바탕으로 
기존의 망상분별을 벗어나고 
그를 바탕으로 하던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 사견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고 
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에 바탕해 행하던 행위를 중지하고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수행의 덕목을 행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무한히 전개해 나가던 고통의 3 계 6 도 윤회의 중독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됨을 밝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말 현실에서 정연하게 
익숙한 형태로 반복되어 얻는 그런 내용으로부터 
처음부터 각 생명이 전혀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이라면 
도대체 이런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할 것인가.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다.

현실에는 
각 생명이 문제삼는 내용이나 생사, 고통 등이 
본래 실답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에  
각 생명들도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 현실이 본래 생사 고통이 없다고 
누군가 밝히고 선언함으로써 
이로 인해 각 생명이 문제삼는 내용이나 생사, 고통이
곧바로 사라지고 전혀 없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현실에서 문제삼는 내용이나 생사 고통 등이 
본래 그렇게 있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생명들이 일으켜 갖는 
망상분별과 집착의 바탕에서는 
그런 고통의 현실은
역시 익숙하고 정연한 형태로
반복해서 대하고 만나게 되고
거기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부처님은 각 생명이 자신들이 대하는 현실이
본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올바로 관하여 
그런 고통을 향해 나아가는 상태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며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doctr 님이 제시한 것처럼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는
실재 자체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만을 놓고 생각한다면, 

그 실재에 대해서 
이것을 어떤 언어나 판단으로 분별을 하던, 
또는 그에 대해 일체 언어진술이나 관념적 분별 판단을 중지하고 떠나던, 
그와 관계없이 
실재는 실재대로 아무 영향을 받지 않고 
그대로라고 할 것이다. 

즉 공한 실재는 
어떤 이가 그것을 공하다고 진술하고 표현한다고 하여
비로소 그렇게 공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해,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과 같다 -과 다르다. 
좋다 나쁘다 깨끗아다 더럽다 등등으로 분별하지 못한다고 
진술하여서 비로소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또 반대로 이에 대해
아무 진술도 하지 않고 
분별도 하지 않는다고 하여 
비로소 실재가 말을 떠난 상태가 되거나, 
또 비로소 그러한 실재를 자신이 거꾸로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즉 이렇든 저렇든 실재는 실재대로 
여여하게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일 뿐 
그와는 관계가 본래 없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제 그런 실재에 대해

실재는  무조건 A다. 
또는 현실에서 얻는 A라는 감각현실과 a라는 관념이 그대로 실재 자체다. 
또는 실재는 A라는 감각현실이나 a 라는 관념과 그대로 일치하는 내용이다. 
또는 적어도 이와 비례하거나 유사한 내용이다. 

또는 실재란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또는 A  B 등등의 구별이 없는 온통 하나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더라도 
실재는 이런 주장과 관계없고, 
그렇지 않은 실재가 그처럼 된다고 볼 수도 없다. 

또 이런 주장을 누가 계속 한다고 하여서
그런 주장이 잘못이라고 단정할 어떤 실재 내용을 직접 얻어 
이것이 잘못이라고 단정해 밝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런 온갖 주장이나 태도와 무관하게 
실재는 실재대로 여여하게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재는 온갖 감각현실과 생사 고통을 얻지 못하며 
따라서 본래 니르바나에 있다고 하지만,  

실재는 그럼에도, 현실에서 보듯 
온갖 망상분별이 나타나고 머무름을 허용하며,
방해하지 않지 않는가. 

현실에서 행하는 온갖 망상분별과 본래 무관하게 
실재가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오히려 엉터리 주장을 아무렇게나 마구 해도 
실재와의 관계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고 본다. 


그러나, 
무엇인가 문제되고 논의될 때
그 올바른 정체를 찾고 
그 문제의 해결을 구하는 입장에서는
이들의 관계를 정확히 보고
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현실에서 이런 망상분별의 
문제는 그에 그치지 않는다. 

사실이 본래 그러함에도 
그렇다는 것을 그렇게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가운데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집착을 갖고 대하면, 

그 망상분별과 집착에서는 
본래 그 상태가 그렇지 않음에도 
온갖 문제와 고통과 악에 다 노출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최면걸린 이가 
현실에 없는 것도 있다고 믿으면서 행위하거나, 
앞에 든 예처럼 
땅 밑에 금이 있다고 믿게 된 이가 
죽을 때까지 한없이 땅을 파게 되는 일을 
시작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현실이 바로 이러하기에 
본래는 그렇지 않다고 반복해서 부처님이 제시하지만, 
그러나 현실은 현실대로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각종 고통과 악을 그대로 다 받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문제라면 문제인 것이다. 

망상분별 속에서 행하는 
일체 관념 판단과 언어진술은
본질적으로 희론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한편 실재에 대해 분별을 할 때 
그 분별은 일체 그 실재에 본래 적합한 것이 아니다. 
또 심지어 어떤 억지 주장을 하더라도 실재에 관해서는 
그 억지주장을 단정적으로 잘못이라고 밝히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런 바탕에서도 
최소한 현실에서 분별하고 언어로 진술할 때는 
최대한 그런 실재에 걸맞게
상응한 분별과 표현을 하는 것이
그나마 적절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즉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없다'고 분별해 '말하는' 것도 그런 입장이고 

실재는 이분법적인 분별을 행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일일히 문제되는 이분법적인 내용을 나열하면서  
실재는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것에서 떠나 있음을
일일히 '분별하고 말로 표현하는 것'도 그런 입장이다. 

그런데 이를 벗어나 
아예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정연한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오히려 그 망상분별을 강화시키고 고집하는 방향으로 주장하고 나아가면
이는 더욱 올바르지 않고 문제가 된다고 본다. 


doctr 님이 밝히는 바처럼 




단순한 이론적인 차원에서는 
실재에 대한 그런 진술과 주장이 있을 때 
이를 옳다거나, '잘못이라고도' 단정할 수 없으며, 

심지어 주장자 자신도 명백히
그런 사정을 이해하고, 
그런 내용을 단정적으로 옳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런 주장과 견해로 임하면 
그러한 망상분별을 그 망상분별 상태안에서 시정할 수 없게 되고 
결국 그로 인해 받는 그 고통에서도
벗어날 계기를 얻기 곤란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그 자신이 일정한 망상분별 속에 
집착을 바탕으로 
그것을 강화시켜 나가는 입장에서 
그런 주장을 행하고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망상분별 속에서 
현실내용이 정연하게 반복된다고 여겨지고, 
또 그내용이 진짜처럼 여겨지고 
실재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강하게 추리된다 하여도 

그와는 반대로 
그런 고집을 끊고 중지하고, 
또 망상분별 속에서 생각하고 얻는 내용처럼 실재도 그러하다고 
근거없이 고집해 나아가는 것을 중지하고, 

이들이 실답지 않은 것임을 깨닫고 
집착을 갖고 대하지 않아야 할 내용임을 
깨닫는 것이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실재는 어떤 분별로서 분별할  수 없다. 

한편 일체 분별을 떠나고 말을 떠난다고 하여 
그로 인해 비로소 실재를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또 그로 인해 비로소 실재에 머무르게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현실내용이나, 망상분별의 상태라 해도, 
그것은 본래 실재를 떠나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하튼 분별할 때는 
실재에 상응한 형태로 
그것은 '분별을 떠나고 말을 떠나는 것[언어도단]이다'라고 
'분별하고 말하게 되는 것'이고, 

또 그런 입장에서 때로는 
정말 분별과 말도 일체 떠나 
침묵으로 대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마땅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 이후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이들 망상분별의 상태에 들어가 
그들을 제도할 방편을 찾고자 하는 입장에서 
방편적 분별적 지혜를 구해 나가는 것은 
이와는 또 다른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말로써 말이 많은 세상에서 
이 말들이 결국 어떤 상태를 벗어나고
어떤 상태를 향해 얻기 위한 것인가. 

그 근본 취지를 잘 이해하고 대해야 한다고 본다 .


미리 이것을 잘 이해하고 수행하지 않으면 
고통에 직접 노출되게 마련이다.  

또 고통에 직접 노출된 상태에서는 
그 상태에서 고통을 벗어날 계기를 찾아내기 힘들다고 
일반적으로 보게 된다. 

미리 잘 이해하고 수행에
힘써야 한다고 본다.


일체가 공하다. 현실에 본래 생사 고통이 없다.  
이런 관찰과 이런 선언만으로 
정말 각 생명이 이 내용대로 
일체의 생사 고통과 재앙을 
받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그런 관찰과 선언 만으로 곧 
그런 생사 고통과 재앙에서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본래 그런 것이 있던 없던 
현실의 생명은 단순히 그런 선언과 그런 내용만으로 
단순히 그렇게 되지는 않는 것이다. 

이는 잘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매우 이상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에 현실에서
수행에 힘쓰고 꾸준히 정진 노력해야 함이 
강조되는 것이기도 하다. 

스님들이 공연히 머리를 깍는 것은 아니다. 





>>>

Mickey 3D - 1988

>>>

https://www.youtube.com/watch?v=ULhNJ8f8k0M

>>>





○ [pt op tr]  Mickey 3D - 1988 가사 






문서정보

 




◈Doctr Gong 2015/01/28/수/12:19


♥ 잡담 ♥불이법문과 언어도단


불의 정체를 밝히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불을 놓고 법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여 
이 내용을 불이법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이는 말 장난에 가까운 이야기다. 




[ 그림 - 불의 정체에 대한 논의 ]


그러나 불을 놓고 불의 정체를 밝히고자 하는 논의는
결국 그 실재를 밝히려는 논의가 되고
따라서 불이법문(不二法門)과 관련되고 
mun 님이 말한 언어도단(言語道斷)과도 관련되는 내용이라고 본다. 
http://story007.tistory.com/1023 ☞♥ 잡담 ♥언어도단과 안락행  





little 님이 또한 이 불의 정체를 밝히는 문제와 관련하여 



http://story007.tistory.com/1024 ☞♥ 잡담 ♥ 새로운 생각의 필요성 
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제시했다. 

...
감각현실로 얻는 내용, 관념으로 얻는 내용과 
그대로 일치하는 내용이 실재의 내용이다. 
또는 적어도 유사하고 비례하는 그 어떤 내용이 실재의 내용이다. 

이런 주장을 한다해도 
실재에서 어떤 내용을 직접 얻지는 못하므로, 
그 사실로는 이런 주장을 직접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런 주장이 옳은 지 그른 지, 
어느 쪽으로도 단정할 수 없는 상태로 
남을 뿐이다. 
...

이런 내용은
비록 이론상 실재의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지만, 
그 얻지 못한다는 사실이 
A 가 없음을 단정하게 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내용이라고 본다. 

물론 당연히 이를 통해서는
감각현실과 관념과 같은 내용이 그 안에 있음을 
적극적으로 단정할 수도 없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little 님은 
바로 그런 사정 때문에 
감각현실과 관념과 같은 내용이 '없다고 할 수 없다' 

=> 그리고 이런 내용에서 
현실의 감각현실과 관념들의 내용이 
매우 반복하고 
정연하게 펼쳐지고 또 익숙하게 얻어진다는 경험 자체를
얻게 되는 근거를
찾아내고자 하는 취지라고 본다. 


 
mun 님이 언급한 언어도단이란 표현은
유마힐소설경 견아촉불품(見阿閦佛品)에서도 보인다. 


다음 부분이다. 

...

K0119V09P1002b13L; 亂不智不愚不誠不欺不來不去不

K0119V09P1002b14L; 出不入'一切言語道斷'非福田非不

K0119V09P1002b15L; 福田非應供飬非不應供飬非取非

K0119V09P1002b16L; 捨非有相非無相同眞際等法性不

K0119V09P1002b17L; 可稱不可量過諸稱量非大非小非



그 때 부처님께서 유마힐에게 물으셨다. 


"그대는 여래를 만나고자 하는데 

어떻게 여래를 보는가?" 


유마힐은 대답하였다. 

"제 자신이 이 몸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實相]을 보듯이 

부처님을 보는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저는 여래를 다음과 같이 봅니다. 


여래는 과거로부터 오신 것도 아니고, 

미래로 가시는 것도 아니며, 

따라서 현재에 머물러 계신 것도 아닙니다. 


(저는 여래를) 색(色)이라고도 보지 않고, 

색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色如]라고도, 

색의 자성[色性]이라고도 보지 않습니다. 

... 



오는 것[來]도 아니고 가는 것[去]도 아니며, 

나가는 것[出]도 아니고 들어오는 것[入]도 아니며, 

일체의 말로는 표현해 낼 수 없는 것[言語道斷]입니다. 


...


fr k0119sf-- ☞"그대는 여래를 만나고자 하는데 

결국, 여래란 말로는 표현해 낼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표현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고 본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정작 
'말로 표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유마힐소설경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에서도 
이런 비슷한 사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둘이 아닌[不二] 법문(法門)에 깨달아 들어가는 방안에 대해 
질문을 던지 유마힐은 
다른 보살들의 대답을 듣고 나서 
침묵으로 자신의 답을 대신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둘이 아닌 상태에 대하여 그것을 밝히고자 할 때 
말을 하지 않으면,
그로써 그것은 비로소 둘이 아닌 상태를 나타내거나, 
그로써 둘이 아닌 상태가 된 것인가. 

반대로 둘이 아닌 상태에 대하여 
말로써 설명하고 분별하면, 

그것은 또 반대로
둘이 아닌 상태를 나타내지 못하거나, 
둘이 아닌 상태를 떠난 것인가. 

이런 질문을 제기하고 검토할 때 
그것은 그렇게 볼 수 없다고 본다.


불의 정체를 실험하면서 
불의 실재가 무엇인가를 찾고 

[IMG2--15] http://buddhism007.tistory.com/691 ☞● 불의 정체의 실험

08pfl--image/불의정체-실험.jpg 

[img2--01]

08pfl--image/존재의_영역_설명.png



존재가 문제되는 각 영역 차원의 내용을 나열하고 
이들 내용과 실재와의 관계를 살피는데, 


이런 여러 실험이나 연구과정에서 
실재의 정체를 찾고 
실재 내용을 추리는 하지만, 
그것을 직접 얻지는 못하므로, 

모두 이런 안타까운 한계에 모두 노출된다고 본다 .


그런데 이 상황은 
여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또는 여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전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또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본래 무슨 말을 하고, 
관념 분별 판단을 진행시키고 
감각을 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모두 중지시키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원래 이런 상태로 이러하게 있다는 것을
그렇게 나타내는 것 뿐이라고 본다. 

자칫
침묵하고 아무 말을 안하고 있으면 
그것은 실재의 내용이거나, 
실재의 내용에 상응한 내용이 되고, 
또는 실재를 올바로 가리킨 상태가 되고 

무엇인가 이에 대해 분별하고 말하면 
그것은 실재의 내용이 아니거나, 
실재와 상응한 내용이 되지 못하고 
실재의 내용을 파괴하는 행위가 되는 것처럼
잘못 오해할 수가 있기에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거나 그렇지 않거나, 
실재는 실재라고 보아야 한다. 

실재에 대해 말한다고 실재가 파괴되는 일도 없고 
말하지 않는다고 실재가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 얻게 해주는 일도 없는 것이다. 


만일 침묵이
실재를 설하는 가장 훌륭한 방안이라면 
부처님은 왜 그렇게 많은 말씀을 하셨고 
사람들은 왜 말을 많이 하신 부처님께 귀의하고 
말이 없는 바위나 모래 자갈에
귀의하지는 않는가. 


little 님이 제기한 의문은 
이런 기본적 논의를 바탕으로 
여전히 유효하고 의미있는 질문을 던지는 내용이라고 본다. 


실재가 그와 같고
그 내용을 직접 얻을 수 없고,
실재는 말로 분별할 수 없고 
이분법상의 여러 분별을 모두 떠나 공하다. 

사람들이 생멸한다, 태어나고 죽는다, 고통을 받고 고통에서 벗어난다. 
등등으로 생각하고 분별하지만, 
그러나 여기에 본래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지만, 

그러나 이런 사실로 
현실에서 정말 태어나고 죽는 일 등에서
그 고통이나 공포를 초월하고, 
이를 받지 않고 벗어나 머무르는 이가 
도대체 누구인가. 

불의 정체를 관하면서 
불의 실재가 공하다고 하지만, 
정말 불을 대하여
화상을 입지 않고 
화상으로 고통을 받지 않을 이가 또 그 누구인가. 

분명 어딘가에 그런 초월적인 상태의 수행자가 있기는 할 것이다. 
마치 유마힐소설경에 나오는 유마힐과 같은 분이 그런 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이가 문제가 아니고 
대부분 고통을 받게 마련인 
일반인들이 다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세계에서 
이들 내용이 정연하게 펼쳐지고 
익숙한 내용으로 펼쳐지므로 
이것을 그렇게 문제로 삼아서 
이 문제를 살펴야 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공하다고 선언함으로써 
이 문제가 다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다 .

그러니 그에 대해 여하튼 해명을 하라, 
이런 것이 little 님의 요구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정당한 요구로 보인다. 

little 님 말대로 
실재의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지, 

그 안에 
현실에서 얻는 관념이나 감각현실과 일치한 내용이 
전혀 없다는 사실까지 단정적으로 밝힐 수 있고
그것을 제시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런 반론인 것이다. 

물론 little 님이
그런 내용들이 적극적으로 실재의 내용으로서 존재한다. 
이렇게 단정해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실재를 얻을 수 없다고 하여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반대로 밝힌 것인가. 

그런 상태에서 
현실의 내용은 매우 정연하게 반복하여 
익숙한 형태로 얻게 되는 것 아닌가. 
그러니 실답다고 보고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가 아닌가. 
이렇게 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 실재에 대해서
전혀 언어 분별을 떠난 상태로 임하지 않고 
이렇다 저렇다 분별하고 말하면 
마치 실재에 대해 위반된 내용을 말하고 
그것이 언어도단의 상태에
위배된 것처럼 말하지만, 

그러나 실재가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내용은 도대체 어디에서 얻는가. 

이런 것이 little 님의 반문의 취지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감각현실이나 실재에
언어나 관념에 해당하는 내용을 얻을 수 없다면, 
그래서 그런 내용이 그것에 전혀 없는 것이라면, 

반대로 
언어나 관념을 가지고 말하고 분별하는 것에 대해서도 
신경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분별을 한다해도 
본래 그런 것이 해당될 내용은
전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반대로 말하면
그렇게 해도 아무 관계가 없다. 
그로 인해서 생겨날 실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태평하게 보아야 한다. 

실재는 언어도단으로 임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수한 무량한 언어로 복잡하게 기술해도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언어로 기술한다고 해도 
실재가 파괴되지도 않고 
그것으로 영향받을 일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슨 관계인가. 



그러나 물론 1차적으로
실재에 대해 논의하고 문제삼는 이들이 대부분 
기본적으로 
이에 대해 걱정하고 우려하는 바가 있기는 하다. 

그것이 사실은 원래 언어도단을 말하게 된 취지라고 본다. 

사람들이 
자신이 분별하고 언어로 기술한 내용을 
실답다고 보면서 
그에 대해 집착을 갖고 매달리는 현상이 
사실은 이런 판단에 이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문제 때문에
현실의 고통의 문제가 해소되지 않고
증가되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즉 그런 언어 분별로써 그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본래 그런 언어 분별은 그에 해당되는 바가 아니므로 
그런 분별을 하던 말던
관계가 본래 없다고 해야 한다고 본다 .

그것이 사실 생사 즉 열반의 본 취지라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글을 쓰기는 썼지만, 
본인도 무슨 내용을 썼는가 오락가락한다. 

유마힐소설경의 내용을 보다가, 
계속 오락가락하게 하는 내용을 대하다 보니, 
little 님의 주장을 놓고서도 
그런 생각을 갖게 된다. 



 >>>

 Sheila - Petite Fille De Français Moyen

 >>>

http://www.youtube.com/watch?v=PzlTE6kFNI0




○ [pt op tr]   Sheila - Petite Fille De Français Moyen 가사





문서정보

 



◈Doctr Gong 2015/01/28/수/03:22


♥ 잡담 ♥새아바타-아이콘 

아바타 아이콘은 두상의 크기가 생명이라는 입장에서 
새로 제작했다. 



문서정보

 




◈Lab value 불기2559/01/27/화/08:53


♥ 잡담 ♥방편과 진실의 관계 

TV를 보다 보니 사람들이 차나 커피를 담아 마시는 보온 컵인 
텀블러의 세균오염도가 변기보다 더 높다는 내용을 보게 된다. 
매일 텀블러를 씻는 사용자의 텀블러의 세균수치가
변기보다 2 배 이상의 수치가 나온다고 한다. 

[텀블러 tumbler] 
fr KBS2 위기탈출 넘버원 2015-01-26 방영


결국 텀블러에 차를 담가 마시는 것보다는 
변기에 담긴 물에 커피를 타 마시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런데 TV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텀블러를 씻을 때 잘 건조해서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라고 한다. 

나도 그것이 아니고 변기도 잘 건조해서 ~

세균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우리의 눈이 밝아서 세균의 모습을 일일히 볼 수 있다면, 
자신이 늘 사용하는 온갖 것 
예를 들어 마우스나, 핸드폰이나 그런 것들에 
수많은 개미나 바퀴벌레나 뱀 같은 생명체들이 달라 붙어
우글거리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개미나 바퀴벌레가 출몰하는 어느 곳에 단 음식을 놓아 놓고 지켜보면 
곧 그런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음식 주변으로 수없이 많은 개미나 바퀴벌레가 모여드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런 모습이나, 
현실에서 대하는 손잡이나 키보드나 온갖 사물들의 
상태가 사실상 사정이 비슷함을 관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관할 수 있게 될 때,
사람들이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보통 어떻게 나아가는가 하면 
이제 알콜이나 락스를 들고 온갖 곳을 
문지르고 닦아 나가기 쉽게 된다. 
온갖 곳을 무균 상태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잘못하면 강박증이 되기 쉽다. 

보이지도 않는 곳마다 온갖 세균이 가득하다고 여기고 
또 닦고 또 닦아대야 겨우 이들이 다 없어졌다고
생각하며 안심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자신의 몸 자체가 이미
그런 세균이 가득 살고 있는 
하나의 세계라는 것을 관하게 되면,
이제 어떻해야 하는가. 

매일 알콜과 락스를 마셔서 몸 안을 무균 청정상태로
만들어야 하는가. 


사람들이 먹는 야구르트 같은 것은 아예 
몸에 좋은 세균을 먹는 것이다. 

과거에 몸에 좋다고 무슨 개미나 이런 것을 
마구 잡아 먹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는 세균이 자신 몸안에 옮겨가 잘 살아가라는 의미로 
먹는 것이니, 이런 경우와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고 본다.  

결국 이런 내용을 보면 이들 문제가 조금은 
관념적으로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가와
관련되는 것임을 볼 수 있다. 

변기보다 더러운 텀블러를 가지고 차를 마셔댄 이들이 
모두 그로 인해 큰 중병에 걸렸다면 모르는데 
TV에서 실험에 응한 이들은
대부분 건강하고 건전한 상식과 표준적 매너를 가지고
매우 깔끔하게 활동하는  
방송사 남녀 아나운서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를 놓고
조금 심하게 말하면
앞으로는 텀블러를 이용하는 것보다 
변기 물을 떠서 마시는 것이 더 낫다 이런 결론도 얻게 된다. 


간접 흡연이 직접 흡연보다 해롭다고 하니 
직접 흡연하는 것이 좋다거나, 

거리에서 흡연하는 이가 사회에 해를 끼치는 것 보다는 
매연 가스를 배출하는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간혹 교통사고를 일으키는 이가 더
사회적으로 해롭다. 
이런 결론들을 도출하는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  

건강과 관련한 정보를 듣다보면 
상식과 다른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의자에 앉아서 작업하면 
운동을 한다해도 효과가 없고 
건강에 해롭다는 보고를 받게 된다. 

서서 오래 작업하면 골반이 내려가 안 좋다는 보고도 있는데 
여하튼 그런 말을 듣고 서서 작업해 보기도 하지만,  
실제로 서서 한 두시간 작업하다 보면 발이 아프다. 

그렇다고 누워 있으면 좋은가. 

불교 수행 방법 가운데 조금 힘든 수행으로 
대표적으로 가섭존자가 행하는 두타행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오히려 늘 앉아 있고 눕지 않는 단좌불와 수행을 
수행방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어느 설을 따라서 생활해야 좋은지 오락가락해지는 
대목이다. 

세균과 관련해 생각하면, 
세균이나 바이러스 이런 것을 주의하고 사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전에 자신이 
사회에서 하나의 바이러스나 세균 
또는 암세포나 기생충이나 해충처럼 
다른 생명에게 피해를 주며 살아가는 것은 혹시 아닌가 
생각하며 주의를 기울이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현실적으로 위생 청결상태가 좋은 선진국에서 
아토피나 당뇨병, 비만 등의 각종 질환이 
비례하여 나타난다는 보고도 받는다. 

아토피 같은 질환은 오늘날 그 원인을 명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인데 
여하튼 그 수치는 문명과 청결도에 비례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종 백신을 조기 접종하는 이들 문명국의 위생 상황이 
오히려 이들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아닌가 
의심되고 있다. 

이런 점은 우리가 건강에 관해 갖는 상식적인 생각과 
조금 어긋나는 내용이기도 하다. 




little 님과 mun 님의 글을 보다 보니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수행자는 현실을 어떻게 관하고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런 점을 깊게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문제를 mun님이 언급하는데, 
그리스 상황이 조금 심각한 것 같다. 



청년실업률이 57 % 에 이른다고 하고 
관광업이 주산업인 그리스는 
공무원 연금과 같은 제도가 다른 나라보다 더 심해서 
퇴직전 5 년의 최고급여액을 기준으로 95 %의 연금을
보장해주었다는 것이다.
상황이 너무 안 좋아 이것을 다시 삭감하고
기타 긴축정책을 펼치라는 외압에 따라 시행하니, 
국민들 전반에 불만이 고조된 상태라는 것이다. 

늘 날씨가 안 좋고 습기가 차서
로마인들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보았던 오늘날 독일 지역에 사는 이들이 
검소하고 질박한 생활을 바탕으로
최고의 경제성적을 거두는데 비해 
남부 유럽 사람들의 성격과 생활상은
이와는 조금 반대라는 보고도 받게 된다. 


여하튼 과거 독일에서 
당시 1차 대전 패전 이후 엄청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상태에서 
히틀러라는 이가 이들 사회 문제를
괴퍅한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며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배경에는 
당시 사회 구성원들이 무언가 해결되지 않는 압박과 고통을 심하게 받는 상황이 
전제가 된다. 

결국 사회적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이를 돌파하기 위해 어떤 이가 괴퍅한 방식으로 문제를 보고 
이를 돌파할 괴퍅한 방안을 제시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고 
이런 이상한 방법으로 이 상황을 돌파해 나아가려는 것이
세계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국가 부도 위기에 5 년전부터 몰려 있는 그리스에서  
이번 선거에 승리한 시리자 당은 
그리스가 빌린 부채를 외국으로부터 탕감받고
긴축정책을 폐기하는 것을 공약으로 내걸어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선거에 승리했다고 하는데 
정작 돈을 빌려준 외국에서는 빚을 탕감해줄 의사가 별로 없어 보여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관심을 갖게 된다. 

[참고] 그리스 총선 승리 시리자 "부채 전액상환은 비현실적" 
- 그리스는 3천200억 유로(약 388조 원) 규모인 그리스 국가채무의 절반 정도를 탕감해야 한다는 입장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1/27/0200000000AKR20150127124900009.HTML


다만 제 3 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런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이 상황을 돌파할 방안에는 
기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방안이 있다고 보게 된다. 

우선, 각 개인이 너무 큰 욕심을 갖지 말고 
소욕지족하는 자세를 확보하여 
최소한의 생계 확보 상태에서 
숨쉬기 운동을 하며
평안하게 머무르는 기본자세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또 한편 경제에 참여할 때는 
그 주변에서 가장 잘 하는 이들을 벤취마킹하여 
이들이 사업을 잘 운영하는 모습을 잘 관찰하고  
그 좋은 점을 찾아내 따라 배우고 실천하려는 자세부터
갖추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행자의 자세도 사실은 같다. 

개인적으로 소욕지족하는 자세를 갖고 
개인이 갖는 탐욕을 제거하고
보다 가치있는 것에 관심을 집중시켜
수행에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다시 현실 경제에 임할 때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을 마련하기 위해서 
참여하는 것이며, 

또 그것을 꾸준히 계속 잘 해나가기 위하여 
현실에서 가장 사업이 잘 운영되는 형태를 찾아내 
그에 참여하되, 

그러나 그 목적은 이윤의 극대화가 아니라, 
자신이 사회에 베푸는 이익의 극대화와
이런 방편을 통해 중생제도를 널리 꾸준히 실현해 간다는 목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내용은 결국
무엇이 무엇보다 더 가치있는가 하는 
가치회계의 입장에서
문제되는 각 내용을 가치저울에 올려 놓고
이들의 가치를 잘 비교하여 재는 바탕에서 
그 방향과 출발점이 제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회계 장부나 가치를 재는 저울을 잘못 마련해 잘못 사용하면, 
수행자가 수행에 임하는 것에 대해 
자칫 생계 방편이 없이, 재화를 생산하는 활동은 하지 않고 
사회에 기생해 가려는 활동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이것이 가치 저울을 잘 갖추지 않고 
무조건 회계장부의 숫자에 매달려 집착한 가운데  
세상을 바라보는 잘못이기도 하다. 

가치저울의 한쪽에 생명이나 두 눈을 올려 놓고 
최소한 그와 균형을 이루거나 
그 이상의 가치를 갖는 것을 비로소 가치가 있다고 보고 추구하는 것이 
수행자가 수행에 임하는 기본자세라고 
보아야 한다. 

수행자가 수행을 위해 생계의 방편을 구하거나, 
또는 중생제도를 위한 방편으로 
현실 경제에 참여할 때도 
역시 이런 가치 판단에 바탕하여 
그것을 대하여야 하는 것은 사정이 다르지 않다. 


현실에서 생활해가면서 
티끌보다 못한 것들에
자신과 다른 이를 매몰시키지 않게 하는 근본은 
이처럼 가치저울을 올바로 마련해 
현실에서 문제되는 내용들에 가치 평가를
올바로 행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왜 부처님은 밭을 갈아 스스로 생계문제를 잘 해결하지 않고 
구걸을 행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진 한 농부에게 
부처님이 답한 내용도 사정이 같다. 

수행자는 그저 하는 일없이 놀고 시간을 보내고 
생계는 정작 다른 이에게 기생해서 해결하기 위해 
구걸에 임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자가 구걸을 행한다는 것은 
수행에 전념하는 가운데
해결하기 힘든 생계를 구걸을 통해 해결한다는 목적도 물론 있지만, 

수행자가 오랜 시간 수행을 통해
마음의 밭을 갈아 얻어낸 진리나 가치, 그리고 복을 
중생들에게 베풀어 나누어 주기 위한 방편으로 
수행자 자신이 이들 중생들에게 복을 심어 키울 수 있는
복밭(복전)이 되어 주기 위해 
구걸에 나선다는 뜻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구걸하는 것과 
마음의 밭에서 거둔 수확물인 진리와 가치를 베푸는 것을 
결코 대가관계로 묶어 견연시키지 않는 것은 
상대가 공양을 베푸는 것을 조건으로 
그 대가로 자신이 법을 교환하여 베풀지 않는다는
자세를 의미한다. 

자신이 중생에게 법을 베푸는 것은 
그 필요에 따라 조건없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것이며, 
상대가 자신에게 공양을 베푸는 것도 
또한 그처럼 조건없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것을 받는 것이다. 

이처럼 수행자가 거두는 정신적 수확물과
세간이 거두는 물질적 수확물을 
시장에서 거래하듯 대가관계로 교환하지 않고 
조건없이 베푼 것이 
진정 선행으로서 의미를 갖고 
또 그것이 복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구걸이 적선(積善-선을 쌓음), 복전(福田-복을 심는 밭)이라는 단어와 

관련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이치를 깊게 관하지 못하면, 
수행자는 사회에 필요없는 행을 행하는 무익한 존재라고 보고
무시하기 쉽고,

오히려  
사회에서 각종 질병과 고통의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 낸 다음 
다시 그것을 없애준다고 나서 더 악화시켜 나가는 거북도사들만
가치가 드높은 것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

여하튼 수행자이던 일반인이던 
현실 경제에 참여할 때는 
그로 인해 가치를 잘 만들어 내고 
이것을 꾸준히 계속해 잘 베풀 방편을 찾아내야 한다. 


현실에서 사업에 성공하는 이들은 
매 사업에 임할 때 가장 성공확률이 높은 품목을 
선정해 최선을 다해 임하여 
성공함을 말한다. 

그러나 그런 성공자가 1 명 있을 때 
그 배후에는 같은 품목에 참여하여 
대단한 실패와 파산을 경험하는 수많은 사업 실패자들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또 그와 같이 생각하지 않고
사업에 참여하는 가운데
그런 결과를 맞이하게 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업의 성공에는 그 이유가 있고 
실패에도 이유가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또 사업에 임하는 이에게는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성공할 원인과 자세를 잘 관찰한 다음에 
그것을 잘 익히고 훈련하여
사업에 임하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 그리스 문제를 살피다 보니 
갑자기 디오게네스라는 이가 생각난다.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원정을 결정하고 나자, 

수많은 정치가들과 철인(哲人)들이 그를 방문해 

축하 인사를 했다고 한다. 


알렉산더는 당시 유명한 디오게네스도 당연히 자기를 찾아올 것으로 생각했으나 오지 않자 

자기가 직접 그를 만나보려고 찾아갔다고 한다. 


통에서 살아 가던 디오게네스를 보고 알렉산더가 

“내가 알렉산더 대왕이오"라고 말하자,
디오게네스는
"나는 개처럼 살아가는 디오게네스요"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너는 내가 두렵지 않은가?" 묻는 대왕에게 
디오게네스는 

"당신은 좋은 사람인가요? 나쁜 사람인가요?" 묻고, 


알렉산더가 답하길, 

"나는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하자, 
디오게네스는 

"좋은 사람을 왜 두려워 해야 합니까." 라고 답했다고 한다.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에게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무엇이든지 들어 주겠소"라고 말하자, 


디오게네스는 이에 대해 

“당신에게 가리워 햇볕이 들지 않으니
조금 비켜 주시오”라고 답했다고 한다. 





계단에 누어 다른 철학자들의 통행을 방해하고 있는 이가 디오게네스라고 한다. 


[ 그림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 


당대 최고 권력가에게
이런 무례한 발언을 하여 
목숨이 유지되었다는 것은 특이한 사례인데 

여하튼 돌아오는 길에  
이런 무례한 태도에 분노를 표하는 부하들을 상대로 

알렉산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다르다. 

만약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나는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에 대해 디오게네스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만약 내가 디오게네스가 아니었다면, 

나는 역시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런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의 만남을 

“얻으려는 자와 버리려는 자,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절묘한 만남”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알렉산더를 정복을 향한 욕망의 노예라고 표현하고 

디오게네스를 속세의 모든 열정과 욕망을 정복한 정복자라고
보기도 한다. 



그래서 금욕주의를 실천한 스토아(Stoa)학파는 

이런 디오게네스를 

이상적(理想的)인 현인(賢人)으로 보기도 했다고 한다. 


디오게네스에 대해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디오게네스란 이름을 가진 철학자 동명이인이 많아
시노페의 디오게네스(Diogenēs of Sinopē 그리스어: Διογένης ὁ Σινωπεύς  B.C 412년경 ~ B.C 323년경)라고
구별해 부르는데, 
그는 처음 고향 시노페에서 가짜 돈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고향에서 쫓겨나
아테네에 와서 안티스테네스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그가  대부분의 인습과 믿음이 잘못된 것임을 밝히려 했고
'가짜 돈 가짜 가치가 세상에 유통되지 못하게 하고 
현행 통화(通貨)의 폐지를 사명으로 삼았다는 것과 관련되는 사건으로 보인다. 

스승 안티스테네스 (B.C 444년-365 년경)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는데, 

"나는 내가 배고프지 않을 만큼, 목마르지 않을 만큼 가졌다. 

벗지 않을 만큼 입었다. 

밖에 있을 때는 저 부자 칼리아스보다도 더 떨지 않고 안락하다. 

안에 있을 때는 따듯한데 왜 옷이 필요한가?"

이런 내용을 말했다고 전해진다. 


디오게네스는 이런 스승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가능한 작은 욕망을 갖고 사는 자세 (아스케시스 askesis 고대 그리스어: ἄσκησις,) 

스스로 만족하는 자세 (아우타르케이아 autarkeia 고대 그리스어: αὐτάρκεια)와 함께,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인습과 권위에 묶이지 않고, 부끄러움을 없애는 것 (아나이데이아 anaideia 고대 그리스어: ἀναίδεια)를 

바탕으로 생활했다고 한다. 


신이 아무런 부족함도 없고,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라면,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그만큼 신과 자연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된다고 말하였다고 하며, 


자연적인 반문명의 사상을 그는 실행하여 

생애에 한 벌의 옷과 한 개의 지팡이와 자루를 메고,

키벨라(Cybele)라는 여신을 모시고 있는 사원 옆에

통을 두고 통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한때 표주박을 지니고 살았었는데, 
개가 표주박 없이도 웅덩이 물을 잘 마시는 것을 보고 
( 또는 소년이 손으로 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 ) 
그 표주박도 버리고 살았다고도 한다. 

왜 디오게네스가 자신을 스스로 개와 같다고 말하였는가
또 이들을 견유학파(犬儒學派)라고 부르는지 살펴보니, 사정이 복잡한데 
금욕적 자족을 강조하고 향락을 거부하는 디오게네스는 

개의 덕(德)을 공공연하게 칭찬하였다고 한다. 

개를 본받아 가식과 위선에서 벗어나면 
진정한 내면의 세계, 진리,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림 디오게네스와 개] 

디오게네스는 왜 자신을 스스로 개와 같다고 말하는지 묻는 이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에게 무엇을 주는 사람에게는 꼬리치면서 반기고,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시끄럽게 짖어대고, 

내게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달려들어 물어버리기 때문이다”


또 개는 아무 것이나 먹는다. 

어디에서 잘 것인지 걱정을 하지 않는다. 

개는 주어진 상황을 불평하지 않고 걱정 없이 살아간다.

아는 척하면서 어렵고 추상적인 철학을 하지 않는다고 
개가 갖는 덕을 말했다고 한다.  


그는 습관은 제 2 의 천성이라고 말하고, 
코즈모폴리턴(cosmopolitan-사해동포주의자)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하며 

“알렉산더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왕이 내킬 때 아침 식사를 하게 되지만, 

자신은 내킬 때 아침 식사를 한다”고 말했다고도 한다. 


그렇게 개와 같은 형태로 궁핍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와 철학으로
무엇을 얻는가 묻는 제자에게 
“다른 것은 몰라도 어쨌든 
어떤 운명이라도 헤쳐 나갈 마음가짐이 되어있는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알렉산더와 만남을 가진 디오게네스는 
공교롭게 같은 해(B.C 323년)에 사망하는데 
물론 디오게네스는
평소 개처럼 먹고 지내기에 위생상태가 안 좋아 
콜레라로 죽었다고도 하고
생낙지를 먹고 죽었다고도 하고 
스스로 숨을 멈추어 죽었다고도 하는 등으로  전해지지만, 
그는 사실 당시로 보면 
대단히 장수했다고 볼 89 세의 나이에 죽은 것이고
알렉산더(Alexandros the Great, BC 356 ~ BC 323)가
오히려 33세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이어서
대단히 짧은 수명만 살다가 
죽은 것이라고 보게 된다. 

여하튼 

이처럼 사회적 관습을 무시하고, 
통에서 살고 아무데서나 잠을 자는 등으로 
살아가는 행태가 개와 비슷하다고 해서 
이들을 개같은 선비(견유犬儒)라고 하고, 
이들의 사상을 견유학파(犬儒學派)라고도 하는데, 
개는 고대 그리스어로 Κύνος 키노스라고 하고  
이들을 키니코스(cynikos=개같은)학파라고도 말한다고 한다. 

이들 견유학파가 세상의 관습과 권위를 조롱하고 비웃는 태도로 인해 
이들 견유학파의 특징을 냉소주의(cynicism)라고도 표현하는데 
냉소주의를 나타내는 cynicism이나 냉소적이라는 cynic이란 표현은
개같다는 cynikos라는 말과 
견유학파인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가 강론을 펼친
아테네 시 외곽의 연무장(演武場: gymnasium)의 이름 Cynosarges(하얀 개의 장소)에 연원이 있는 말이라고 한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cynicism (교양영어사전2, 2013.12.3, 인물과사상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76531&cid=41810&categoryId=41812
http://en.wikipedia.org/wiki/Diogenes_of_Sinope

디오게네스는 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녔는데 
그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정직한 사람을 찾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등불을 켜고 다닌다고 정직한 사람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는 의문시 되지만, 
여하튼 이런 자세가 디오게네스의 
냉소주의적인 태도와 관련되는 것 같다. 



[그림 디오게네스와 등불]


그리스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살피다가
당시 그리스를 배경으로
세계 정복을 향해 나아가던 알렉산더대왕과 
디오게네스를 대비해 살피게 된 것은
약간 엉뚱한 곁가지로 빠져 들어간 감이 있지만, 

디오게네스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보니
미처 알지 못한 많은 내용을 보게 된다. 

인터넷 상의 백과사전 내용이나
기타 사이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자료 내용들이 
약간씩 내용 차이가 있는데 
이를 종합해 약간 각색한 것이다. 



[참고 자료] 

한국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시노페의_디오게네스

브리태니커 디오게네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05d2753a
[네이버 지식백과] 디오게네스(시노페의) [Diogenēs] (종교학대사전, 1998.8.20, 한국사전연구사)
인명사전 디오게네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79521&cid=43671&categoryId=43671
두산백과 디오게네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6097&cid=40942&categoryId=33469

블로그 디오게네스 철학자 http://blog.daum.net/storage/13756289
블로그 디오게네스 http://wno1.tistory.com/633

[황남구의 습자지 철학] 통 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 *디오게네스, 개처럼 살다 사라진 무욕(無慾)의 철학자 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784603
고대 희랍의 명철(名哲) 디오게네스(글 - 최기영) http://blog.daum.net/zero-can/2204
[네이버 지식백과] cynicism (교양영어사전2, 2013.12.3, 인물과사상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76531&cid=41810&categoryId=41812

영어 위키백과 http://en.wikipedia.org/wiki/Diogenes_of_Sinope




여하튼 
현실경제 생활에 실패하고 
mun 님 표현대로 can 상태가 되어 
또 다른 측면에서 can 을 주장하고 
한편으로 무한화폐와 무한신용카드의 발급과 사용을 제시하고 
다삼작전에 임하는 수행자를 자처하며
가치와 진리 방면의 연구에 임하는 입장에서 

이런 디오게네스 입장에 완전히 공감하지는 않지만, 
여하튼 시사를 받을 내용이 조금은 있다고 본다. 


어떻게 보면 디오게네스의 삶의 자세는 
불교 수행자가 행하는 두타행과도 관련되는 것 같기도 하고, 
부처님이 가르치는 소욕지족 안인의 자세를 제시하는 것도 같지만,

또 디오게네스가 거리에서 성행위를 거침없이 하곤 하였다는 등의
부분에서는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나 디오게네스가 기본적으로 
통속에서 개처럼 생활하면서 
세상사람들이 갖는 인습이나 권위를 부정하는 입장은 

불교에서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행하는 일체 분별이
모두 전도된 망상분별이며
각 생명이 이런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하여 
삶에서 고통을 받게 되고 
나아가 고통스런 3 계 6도 윤회과정을 무한히
밟아 나가게 된다고 보는 
불교의 가르침과도 어느 정도는 관련된다고 본다. 


다만
세상이나 삶의 정체에 대해 제시하는 진리의 내용에서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고 

또 수행자가
아무리 세상의 생명들이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하여 삶을 전개해나간다고 보더라도, 

다시 이들 생명을 구제하고자 
이들 생명의 망상분별과 집착의 상태에 들어갈 때는
이들이 제도될 수 있는 올바른 방편을 찾아 
대해야 한다는 부분에서도 
역시 상당한 차이가 있게 된다고 본다. 


세상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여러 분별과 판단을 
단지 냉소하고 비웃는 것만으로 
이들이 변화를 일으키고
또 세상사람들이 디오게네스처럼
통 속에서 개처럼 살아가는 것을 좋다고 보고
이를 원하고 행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로 인해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행복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방편을 취해 다른 이를 구제하고 이끄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수행자는 세상의 입장이
비록 기본적으로 전도 망상분별에 바탕한 것이라고 보더라도 

다시 그런 세상으로부터 존중받을 수 있는 형태를
기본적으로 생활자세나 수행자세로서 지켜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세상에서 존중받고 모범이 될 형태를
취해야 한다. 

그것이 부처님이
수행자에게 제시하는 여러 계율의 내용이기도 하다. 

생명들 그리고 세속의 사람들이 집착하는 바를 그대로 놓고
그런 내용을 존중하고 
수행자는 이를 함부로 침해하지 않는 수행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내용이 이와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수행자가 자신 스스로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에 대해 망상 분별을 갖지 않고 
이에 집착하지 않아야 함을 부처님이 가르친다고 하여 

수행자가 
다른 생명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명예 등등을 대할 때에도 
수행자가 이를 함부로 무시하고 침해해도 무방하다거나,
함부로 막행 막식하면서
자신의 탐욕을 추구하고
다른 이를 함부로 욕하고 비난하는 등의 자세를 취해도 된다고는
결코 보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함부로 행하면 결코 안 된다고 보고, 
생명이 일반적으로 집착하는 생명, 재산, 가족, 명예...등을 함부로 
침해하지 않을 것을 계율로 제시하며 이를 막는 것이고 [정계]

또 수행자는 이와 함께,
망상분별과 집착을 떠난 가운데 
자비희사의 마음을 일으키고 
얻을 것이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하여 
자신의 탐욕과 집착은 제거하여 없애고,
세상사람들이 집착하는 좋음을 베풀고 [보시]

또 다른 생명이 자신의 생명, 재산, 가족,...등을 침해할 때는 
망상분별과 집착을 떠나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평안하게 참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안인]
자비희사의 마음으로 이들을 대할 것을 
강조하게 된다. 

이는 이런 두 내용이 그 자체적으로 이율배반적인 내용이
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수행에 임하는 
수행자가 취할 올바른 방안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수행자가 취하는 진실과 방편의 문제는 
자신과 다른 생명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최종 목표상태는 
모든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여
모든 번뇌와 고통이 제거된 니르바나 해탈과 
깨달음(보리)를 얻는 상태이지만, 

그러나 여기에 자신 스스로 도달하고
또 다른 생명을 이끌기 위해 취해야 하는 방편은  

이 상태를 향해 무조건 직접 돌진해가게 하는 방편보다는 

다른 생명이 놓인 상황과 입장에서
이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방편을 찾아 
이를 제시하는 것을 올바른 방편이라고 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직접 그 상태로 이끌고자 하면 
이를 이해하거나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지극히 두려워하고 
피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중생제도라는 목표를 놓고
세상을 대할 때 취하고 익혀야 할 방편은 
앞과 같은 기본적 내용 외에 다시
수많은 지혜와 방편을 갖추는 것이 요구된다고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방편과 진실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도 
이런 문제로 인한 것이며 
법화경 방편품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부처님이 불승 이전에 삼승을 벌려
중생을 가르치게된 사정과 이유도 
결국 이런 문제와 관련이 되는 것이다. 

또 법장비구가 극락세계를 건설하여 
수행자들이 빨리 이 모든 수행을 완수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또한 이런 사정에 바탕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 little 님이 제기한 내용은 비록 반복되는 논의로 보이지만, 
조금 더 근본적인 문제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현실이 실답지 않다고 해도 
정연하게 반복되고 익숙하다는 점에서 
이를 실다운 내용으로 대하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제기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극히 고통을 호소하는 현장을 보면 
결국 의식주를 통한 생계해결과 기타 기호품의 해결 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게 된다. 

이를 중의적인 표현으로
빵과 차의 문제로 요약해볼 수도 있다고 본다. 

기호품의 문제를 살피면, 
경제사정이 어려운 그리스와 같은 곳은 흡연률이 유럽에서 최고 높은 57 % 를 기록하고 
내전을 벌이고 있는 시라아 같은 곳에서는
총을 가지고 전투에 임하는 이들이 담배가 없다고 소리치고, 
is 대원들은 축구를 보거나, 음악을 연주하거나, 복장이 불량한 이를 처형하고 
담배를 피워대는 이들의 손목을 자르는 등으로 이슬람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는 보고도 받는다. 

현재 담배가 1 갑 남아 있고 담배값은 올라 있는 상태에서 
담배를 놓고 같은 고민을 하게 되는데 
1 갑의 담배를 사는 대신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유익한 일이 
상당히 많다고 보기 때문에 담배를 끊어야 하는데 
이 중독현상이 상당히 규칙적으로 정연하게 반복하기에 
여기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세계적인 메이저 담배회사는
각국에서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저가로 물량공세를 퍼붓고 있는데 
결국 사람들을 이 중독증세에 끌여들여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얻기 위한 
노력이라고 언론은 보고하고 있다. 
실제로 대부분 4000 원 대 이상인데 3500 원에 외국담배가 판매 중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한편 많은 이가 담뱃값 부담을 피해 전자담배로 도피해가는 추세인데 
전자 담배에 들어가는 재료는 사실은 식품 첨가물로 쓰이던 재료인데
전자담배가 안의 유리섬유에 전기를 흘려 이들 첨가물을 태우는 과정에서 
많은 이상 물질을 발생시키는 문제가 있고 
이런 저런 이유로 이들 재료도 곧 의약외품에 넣어 관리해나간다는
보고도 받게 된다. 

이 중독에서 다른 중독으로 옮겨 간다고 해서 
비용이나 건강 문제가 크게 나아진다고 보기 힘들다. 

다만, 사람이 옷입고 밥만 먹고 잠자며 산다고
삶의 문제가 원만히 해결된다고 보지 않는데, 
사람은 살아가면서 무한한 욕망으로 나아가고 
또 다른 기호식품을 원하고 이에 중독되어 간다. 


비교적 건전한 기호식품에 차가 있는데 
타는 자동차도 이 항목에 같이 넣어 줄 수 있다. 


little 님의 질문에 이렇게 의문을 다시 제기해보자. 

현실의 여러 내용이 매우 익숙한 형태로 반복되어 
이들이 다 실다운 내용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데, 

우선 기본적으로 
자신이 마시는 보리차 하나를 놓고 
이 보리차의 맛을 언어로 기술해 표현해 
브라질의 커피 농장에서 일하는 이에게 보낸다고 해보자. 

그 표현으로 상대가 그 보리차 맛을 그대로 전달받을 수 있다고 보는가. 

보리차를 마시는 순간 맛보고 느끼는 내용과
이를 놓고 생각하고 표현하게 되는 그 내용들은
그러면 서로 무슨 관계에 있는가. 

그러면 여기에서 반대로 보리차를 마시면서 
그런 생각없이 감각만 느끼면
또 보리차를 마신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보리차를 마시면서 감각도 하고 생각도 할 때 
과연 도대체 실재로는 어떤 것을 대하여 
그런 것을 얻은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갖고 이 가운데
어느 것이 보다 기초가 되는 내용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여러 내용을 놓고 
이들 관계를 살필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img2--01]

08pfl--image/존재의_영역_설명.png



우리는 이 문제를 밥이나 빵의 문제로 옮겨 갈 수 있다. 

현실에서 밥의 감각과 관념만 얻어 가지면, 
그것으로 배도 부르고 생활해 나갈 수 있다고 보는가.

어떤 것의 정체를 살필 때는 
이것이 단순한 감각과 관념만의 문제인가 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그리고 현실에서 우리가 대하는 밥, 빵, 차 등을 놓고 
이들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 보아야 한다고 본다. 

[IMG2--15] http://buddhism007.tistory.com/691 ☞● 불의 정체의 실험

08pfl--image/불의정체-실험.jpg


각기 1 개의 감각기관을 가진 5 명의 sam 들과 함께 
불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실험을 하는 것은
우리가 얻는 감각현실이나 관념이 
과연 그것을 얻게 하는 실재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내용인가를 관찰하는 실험이기도 하다.

각 sam 이나 little 님이 얻는 내용은 
각 sam 이나 little 님이 얻는 세계 일체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것이 각각의 마음 안에 맺히는 내용이므로 

그것을 가리켜
각인이 얻는 일체의 세계와 현상의 내용은 
오직 마음내용(식)뿐이고 
그 안에 그것을 얻게 한 외부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식무경]


그러나 우리가 밥이나 빵을 먹을 때 
자신의 마음 안에 그런 감각을 얻어 
배가 부르다고 느끼고 활동하는 것은 또 아니다. 

단지 그런 과정에서
그런 밥이나 빵을 먹는 감각도 하고 
이에 대해 그런 생각도 하는 것이 같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얻는 것은 
결국 감각현실과 관념들이기에 
그것을 놓고 그 정체를 살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먹는다고 보는 밥이나 빵을 놓고,
그 실재는 과연 무엇이고 
마시는 차의 실재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세계와 자신의 정체와 그 실재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의문은
단순한 철학적 의문과 사유로서 진행되어 그치는 것은 아니고, 
극히 어려움에 처한 각 개인에게는 
또 다른 주제와 관련된다. 

즉, 이런 내용을 배경으로 놓고 
각 개인은 무엇을 그렇게 정연하게 반복적인 실다운 내용으로 보고
또 그 가운데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추구해 나가는가
또 그 결과 어떤 상태에 결국 빠지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이와 관련되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단지 주제를
살아 있는 동안
생계를 해결하며 행복을 얻는다는 목표만을 놓고 생각하면 
세계 정복을 위해 전쟁터로 나서는 알렉산더 대왕이나, 
통 안에서 그냥 만족하고 살면 되는 일을 왜 굳이 그렇게 해나가는가 
질문하는 디오게네스나 
오십보 백보, 도긴 개긴의 차이라고 보게 된다. 

차라리 생계해결을 위해선 그 두 방법보다는 
농사를 짓거나,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거나, 
장사를 해서 생업에 힘쓰고 살아가는 것이 
도움이 되는 일이지, 

왜 생계대책을 스스로 구하지 않고, 구걸하며 통속에서 살아가는가. 
또는 왜 굳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해치면서 정복하려고 하는가 
이런 시각을 갖게도 된다 .

그러나 또 그 각각의 입장에서 보면 
그래야 할 이유가 설득력있게 보이지 않는가. 

공격을 하지 않으면 공격을 받고 
정복하지 않으면 반대로 정복당한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편하게 쉬고 있을 도리가 없는 일이기도 하고, 

세상이 온통 잘못된 욕망을 갖고 잘못된 위선을 추구하며
잘못 되어가고 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자신이 가장 어려운 물질 상태에서도 
욕망을 줄여 만족을 얻는 마음 자세의 변화만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음을 실천해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결국 자신이 대하는 것들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가하는 문제는 
곧바로 이런 현실 내용을 배경으로 놓고 
각 개인은 무엇을 그렇게 정연하게 반복적으로 추구해 나가는가.
또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무엇을
정연하게 반복적으로 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세계와 자신의 정체,
그리고 이런 내용을 얻는 자신의 정신(마음)의 정체,
그 위치 그 속성을 올바로 깨닫는 것은 

삶의 주제를 단순히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자신이 생계를 해결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얻는가의 문제에만 치우쳐
이 문제를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라고 본다.  

단지 문제가 그것뿐이라면, 
디오게네스처럼 소욕지족으로 일관해 개처럼 살아 가면서도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도 있고 
알렉산더처럼 뜻하는 바대로 외국을 점령하고 정복하면서 
정복자의 기쁨이나 만족을 누릴 수도 있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짧은 견해라고 보는 것이다.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놓고 
이것이 실재로는 무엇인가를 따질 때,  
이들 내용은 적어도 실재는 아니다. 

그러나 실재와 이들 내용은
또 전혀 무관한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본래 아니고 

따라서 실재는 이들 내용과 다르지 않고
따라서 곧 이들 내용이라고 볼 수 있고, 
한편 이들 내용은 곧 실재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들 현상 내용을 실재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 
실재 안에는 이들 내용이 '있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도 
다 함께 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한 실재는 현상에서 보는 것과 달리 
생멸이 없고 늘거나 줆도 없다는 사실 등이 
곧 반야심경이 제시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 색불이공....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공중무색 무수상행식....]


그리고 한편
실재 내용이나 현실 내용에는 
모두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것이 없지만,[무아, 무자성, 인무아, 법무아, 승의무자성]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들 내용이 그런 상태로 전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들 내용 각각의 관계에서 
무엇이 무엇보다 좀 더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은 
각각의 내용을 빼거나 넣거나 하면서
다른 것이 어떤 관계를 나타내는가를 관찰하여
이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어느 상태에서 그에 대한 관념을 없애면 감각현실은 어떠한가. 
또 그 반대의 관계에서는 또 어떠한가. 
이런 식으로 그 관계를 살펴보아야 할 문제라고 본다. 

그런 가운데 삶에서 중요한 점은 다음이라고 본다. 

이들 내용에 관해
자신과 자신이 대한다고 보는 대상들의 정체에 대해
잘못된 분별을 하고 집착을 갖고 대함으로써 
자신과 타인을 모두 잘못된 상태로 이끌어가고 

그런 바탕에서 
번뇌를 갖고 행한 뜻과 말과 행위 태도 자세 등의 업이 
현생과 다음 생의 고통의 3 계 6 도의 윤회를 
질서 정연하게 반복해 가져 오게 된다는 사실관계[혹-업-고]까지 관해야 

비로소 
자신과 다른 생명이 함께 나아가 도달해야 할 
목표점이 보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자신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근본 정신이 자신의 생사에 걸쳐 
어떤 형태로 변화해가는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된다.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모습이 변화하는 것과 관계없이 
늘 유지되고 있는 근본 정신의 정체와 함께 
이들 정신을 포함하여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재료에는 늘고나 줆이 본래 없이, 
무시 무종의 시간대에 걸쳐 그 모습을 변화해 가는데 
문제는 그 형태가 왜 하필이면 
번뇌와 고통을 받고
그것이 증가해가는 형태인가 하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인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중생의 
전도 몽상 분별 상태에 들어가
그들을 제도하고자 할 때는 
비록 많은 선교방편을 취해 나아가지만, 

그러나 그런 선교 방편은 
어디까지나 최종적으로 
다른 중생을 제도에 이끌기 위해 취하는 방편일 뿐이지, 

자신이 망상분별을 다시 일으켜 
그 안에서 무언가 끝내 얻을 바가 있다고 보고  
또 그 안에서 얻는 복덕을
자신과 중생이 얻고 머물러야 할 목표점으로 보고 
이런 수행이나 방편을 취해 나가는 것은 아니다. 

금강경에
보살은 무량한 복덕을 얻는 수행을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얻게 되는 복덕에 탐착을 일으키지 않고
복덕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도
이와 관련되는 내용이다. 

반야심경에서는 이런 
수행자의 목표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集]과 괴로움이 없어짐[滅]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道]도 없으며, 

지혜[智]도 없고 얻음[得]도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완전한 열반[究竟涅槃]에 들어가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느니라. 


fr k0020sf--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LITTLE 님이

 
IS 대원으로부터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아랍어와 코란을 공부하고
시리아나 이라크 이집트 아니면 사하라 사막 등에 가려고 하기 전에 
불교 경전 공부부터 천천히 해서 
기초를 다져주어야 한다고 본다. 





 >>>

 Emmanuel Moire - Beau Malheur

>>>

http://www.youtube.com/watch?v=z33g1V0IoPE







○ [pt op tr]  Emmanuel Moire - Beau Malheur 가사 




문서정보

 






◈Mun Tokyun 2015/01/26/월/13:53


♥ 잡담 ♥사업의 성패


같은 재료를 가지고 간 두 공장이 있을 때 

한 공장에서는
사용하다 보면 곧 부서지고 보기에도 안 좋은 물건을 만들어 오고 

한 공장에서는
반대로 좋은 물건을 만들어 온다고 가정해보자. 


결국 한 공장은 망하게 된다.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망해야 하는데
누군가 억지로 그 공장을 망하게 하지 않고
계속 그 상태로 물건을 계속 만들고
사람들에게 억지로 계속 구매하게해 계속 운영하게끔 해주면,
그로 인한 피해를 또 다른 사람들이 감당해야 한다. 


그리스란 나라가 경제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고 

최근 선거가 있었는데 
일자리 창출, 최저임금인상, 복지 확대 등 대규모 확대 정책을 통해 그리스 경제를 되살리겠다는 

시리자 당이 압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이다. 

이는 그렉시트(Grexit; Greece+Exit,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불러 일으킬 것인가 하는 점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참고 기사] 그리스 총선 시리자 압승

http://pop.heraldcorp.com/view.php?ud=201501261226024873897_1


유럽연합(EU)에는 28개국이 회원국으로 되어 있는데 

이 각 나라의 경제사정이 조금씩 달라 문제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림]-그리스 신전 


비교적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독일 같은 곳은 
마이너스 이자율로 채권을 발행하는 실정인데 
그리스 같은 국가는 10 % 대의 이자율로 채권을 발행한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돈을 빌려가는 쪽에서 이자를 내지 않고
오히려 빌려 주는 쪽에서 이자를 지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간단히 말하면 어떤 경우는 10% 이자를 준다고 하면서 
돈을 빌려가지만 결국은 다 떼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독일과 같은 경우는 그럴 가능성이 적다. 
원금을 최대한 안전하게 보관하는 창구 정도로 생각한다. 
이런 의미라고 한다. 
경제 문외한으로 생각할 때 잘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럴 바에는 그냥 어디엔가 돈을 묻어둘 일이 아닌가. 

그런데 스위스 은행은 돈을 맡기면 
이자를 주지 않고 오히려 보관료를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세계 각곳에서 그런 돈을 맡아
엄청 많은 수익을 얻는다고도 한다. 

상식만 가지고 살아갈 일은 아니다. 

이러니 자연스럽게 부익부 빈익빈의 차이가 
커져 나가게 된다. 

잘 못하는 쪽은 비싼 금융비용을 부담하는 가운데
이미 잘 하던 이들과 경쟁하면서 
경제활동을 해야 하고 

잘 하는 쪽은 원래 잘 했는데
상황이 또 오히려 그 반대인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실제로 현실에서 어렵고 궁핍한 사람들은  
대출을 받기도 힘들지만,
대출을 받아도 대단히 높은 고이율로 대출을 받는데 
그 이율은 원래 경영을 잘 하는 이들도 
감당하기 어렵다고 보는 이율이어서 
사실 특별한 재주가 없으면 이로 인해
전 보다 더 어려운 상황으로 
이끌려 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돈을 떼일 위험을 안고 
돈을 대출해주는 입장에게는
그나마 그렇게라도 급전을 빌려주는 것이
고마운 일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다른 이가 어려운 상태에서 대출받기를 원한다고
무조건 자선사업 형태로 무이자나 낮은 이자율로 
대출사업을 하라고 할 일도 아니다. 

결국 현실에서는 이렇게 경제활동이 
이뤄진다. 

각 경제주체가 어느 경계선부터
이렇게 서로 입장이 크게 달라져
경제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는가. 

생각하면 현실의 갑을간의 지위에서
억울함이 발생하게 되는 사정도
사실은 이와 같다. 


각국 정부는 정부대로 어려움이 많다. 

정부 관료는 개별 기업 주체와는 조금 사정이 다른데
여하튼 이들이 국가 전체의 경영을 통해 
담당자가 직접 수입을 얻거나,
또는 그로 인한 손해를 직접 부담한다고 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체 국민을 위해서 
모든 경제적 선택을 신중하게 현명하게 잘 해주어야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각국은 또 각국대로 
세계 무대에서 경쟁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누가 좋은 성적을 어떻게 거둘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여기에도 걸려 있는 것이다. 


축구시합이 있을 때마다, 
감독이나 선수에게 승패의 전망을 묻지 않고 
도박사들의 견해를 묻고 그것을 보도하는 경우가 많다. 

도박사들이라고 다 그 승패를 맞히는 것은 아닌데 
그래도 여러 도박사의 견해를 종합하면 
조금 그럴듯한 점술사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감독이나 선수는 늘 최선을 다한다. 이런 입장인데 
여기에 투자하는 입장에서 바라보면, 
무조건 믿고 바라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파산을 하고 누워 버리면, 
별 방법이 없다. 

그래도 눕는 것이 나은데 
끝내 눕지 않고, 다른 무리수를 가지고 계속 활동해나가면  
오히려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더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lab 님이 한 때 투자 문외한으로서 
직접 투자에 나섰다가 can 상태가 되고
투자 운영에서 손을 뗀 것은 이런 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고 무조건 계속 고집을 피우면 
그 피해가 오히려 엄청나게 확대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나마 이런 분들이 수행을 명분으로 삼아 
숨쉬기 운동 이런 것에 전념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반대로 보면 손해를 그나마 줄이는 대단한 효과를 
가져오는 일이라고 평가하게 된다. 

무리하게 움직이면 움직일 수록 
손해가 더 커지게 마련이고 
잘못하면,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문제거나 다른 이의 문제이거나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개입해 해결하려고 할 때는
어설픈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아주 전문적인 상태에서 임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세상을 보면 왜 같은 원료를 가지고
어느 곳에서는 좋은 물건을 만들어 내는데
왜 어느 곳에서는 늘 불량품만 자꾸 만들어 내는가.

음식점을 보아도 그렇고
옷가게를 보아도 그렇고
그런 의문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반대로 자신이 맡아 하는 일을 놓고도
다른 이들은 그런 의문을 갖는다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하리라 본다.  




그리스 소식을 듣고 그리스 사태에 공감해 보기 위해
그리스 노래를 하나 듣고 싶은데 찾기 힘들다. 


어렵게 곡 하나를 찾아서 해독 작업 중이다. 
가사를 찾아 보았는데 이 노래 가사가 맞는 지 틀리는 지도 모른다. 

>>>

http://www.youtube.com/watch?v=FQo3dLh6vGE

>>>

ΓΙΩΡΓΟΣ ΝΤΑΛΑΡΑΣ - ΕΝΑΣ ΚΟΜΠΟΣ Η ΧΑΡΑ ΜΟΥ

>>>





○ [pt op tr] ΓΙΩΡΓΟΣ ΝΤΑΛΑΡΑΣ - ΕΝΑΣ ΚΟΜΠΟΣ Η ΧΑΡΑ ΜΟΥ 가사 



문서정보

 




◈Prince evilstupidmiserable Little 2015/01/26/월/08:17


♥ 잡담 ♥새로운 생각의 필요성 

단순히 기존의 생각들을 재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각을 진지하게 해보고 싶다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고방식을 찾아야 한다. 

fr 긍정의 한줄 9/10-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려면 마음을 열어라. 

우리는 자신이나 대상의 정체를 밝히기 위하여 
실재의 내용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현실에서 감각현실로 얻는 자신과 사물의 모습 
그리고 그에 대해 관념으로 생각하는 내용을
그런 실재에서 직접 얻지 못함을 제시한다. 

그것이 이른바 lab 님이 기획한 
불의 정체의 실험이다. 

 

[IMG2--15] http://buddhism007.tistory.com/691 ☞● 불의 정체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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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감각기관이 하나씩만 있는 sam 들을 초대하여 
불을 대하게 하고 
그 불의 정체에 대해 보고를 하게 하여 
각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이 
원래의 실재의 불과는 동떨어진 내용이라는 내용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img2--01]

08pfl--image/존재의_영역_설명.png



존재와 관련한 다양한 영역과 차원에 관한 설명도 사정이 비슷하다. 

각 위층에 표시한 내용은 아래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강 이런 내용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큰 결함이 하나 있다고 본다. 

가장 문제되는 실재에서 그 내용을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실은 이렇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감각현실로 얻는 내용, 관념으로 얻는 내용과 
그대로 일치하는 내용이 실재의 내용이다. 
또는 적어도 유사하고 비례하는 그 어떤 내용이 실재의 내용이다. 

이런 주장을 한다해도 
실재에서 어떤 내용을 직접 얻지는 못하므로, 
그 사실로는 이런 주장을 직접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런 주장이 옳은 지 그른 지,
어느 쪽으로도 단정할 수 없는 상태로 
남을 뿐이다. 

lab 님은 추가로 각 감각을 통한 내용이 이미 현실 안에서 
서로 차이가 난다는 점을 들고 있으나, 

그렇다 해도 현실에서 이들 내용이 매우 반복하고 
정연하게 펼쳐지고 또 익숙하게 얻어진다는 경험 자체가 
이들이 공연히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짐을 반복하는 
실답지 못한 내용들만은 아니라고 보게 된다. 

사실 이들 내용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 입장에서도 결국 
이런 바탕에서 이들 내용에 신경을 기울이고 
현실에서 무언가를 할 때는 결국 실답지 않다는 이런 내용을 
기초로 무엇인가를 행하게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늘 이런 이론을 재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라고 본다. 

어제까지는 어떤 설명이 그럴 듯해 보였어도 
오늘 아침에도 그것이 역시 맞는 지
또 재 점검해보는 노력을 꾸준히 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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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utube.com/watch?v=puUDj6WiUu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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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en Clerc - Laissons Entrer Le Soleil - Let the Sunshine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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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Julien Clerc - Laissons Entrer Le Soleil - Let the Sunshine In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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