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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휴게소]-2016_01월_01주[☎]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6. 1. 1.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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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휴게소]-2016_01월_01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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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vhp7427

◈Prince evilstupidmiserable Little 2016/01/09/토/20:32







○ [pt op tr]  mus0fl--Pierre Perret - Tonton Cristobal.l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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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담 ♥시스템의 횡포

문서 편집 스크립트를 제공하는 입장에서 
각기 다른 Os에서 정상 작동하게 하는 데 
상당한 애로를 겪게 된다. 

prajna 님의 새시스템에 

윈도우 10을 vhd 파일에 설치하고 나서 
테스트해보니 또 작동이 안 되는 부분을 발견했다.

윈도우 10 에서 해당 핫키를 다른 기능에 부여해서
설정해 놓았는지
그 부분에서는 이상한 작동을 한다. 
윈도우 8.1 까지 정상작동해서 그냥 테스트를 안 하였다면 
또 항의를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매 os 마다 다 사정이 다른가. 

현재 xp 부터 시작해서 비스타는 건너 뛰고 
윈도우 7과 8.1 그리고 윈도우 10 까지 
각기 vhd 파일로 os 를 설치해서 
한 번 테스트해보게 되는데 
어려움이 많다. 


핫키 기능이 100 개가 넘는데 

이것을 다 테스트해 볼 수는 없고 

대표적인 것만 테스트해보는데 

몆몇 핫키가 작동이 잘 안 된다. 




그렇다고 os 제작자에게 일일히 문의하고 
따질 일이 아니고 
알아서 모든 os 에서 별 문제없이 작동하도록 해야 된다고 보는데 
이것이 간단한 문제는 아니고 
상당히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된다. 


os 를 vhd 파일로 설치하는데 
또 윈도우 8.1 영문판에서는 
왜 글자가 모두 8 글자로 잘라지는지 알 수가 없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그런 증상이 있는가 
찾아 보게 되는데 그런 증상을 호소하는 글이 하나도 없다. 

아마 영문윈도우 파일로 설치 과정에서 
중간에 한글로 설정을 해서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추리해보게 된다. 

한글로 설정을 했는데 윈도우에 한글 폰트가 지원이 안 되어 있는 
상태이니 글자를 모두 8 글자로 잘라 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8 글자제한은 윈도우 95 이전 버전들에서 보던 현상인데 
그 당시 습관 때문인지 요즘도
파일명 만드는데 공백도 넣지 않고 
되도록 파일명도 영문글자로 
만들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런데 dos 환경에서는 이런 노력이 또 필요함을
실감하게 된다. 

시스템이 에러가 발생하여 수리를 위하여 
도스 환경으로 부팅해서 파일을 열어보려고 하는 경우에는 
또 영문 글자들만 보이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시스템 문제때문에 
정말 골치가 많이 아프다. 

별로 기능이 개선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이렇게 매번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다. 


lab 님은 역사도 부정하고 과학도 부정하고 
그러나 현실에서는 잘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이상한 
주장을 반복하는데 

그러나 컴퓨터 하나만 놓고 보아도 
글자 하나만 잘못 기재하거나, 
쉼표 하나만 잘못 기재해도 
스크립트가 오작동이 발생하게 됨을 보는데, 

단지 무여열반만 말하고 
세상에 임하면 모든 것이 평안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인가. 

prajna 님은 자신은 쓰던 os 만 가지고 
단순하게 문서작업만 하면 되는데 
왜 자신의 시스템에 수많은 os 를 
깔아대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그나마 prajna 님의 시스템이 
os 를 각종 버전으로 깔 수 있는 환경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무여열반이라는 것이 단순히 말로만 
도달되는 것이 아님을 
이런 과정을 통해서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본인이 윈도우키로 핫키를 많이 만들었는데 
왜 어떤 Os 에서는 이상한 작동을 하는가. 

그것은 그 os 제작자가 미리 그 핫키에 
이상한 기능을 배당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본인의 스크립트가 안 되어서 확인해보면 
그 핫키가 본래 그 os 에서 그런 이상한 기능을 
하게 되어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용자들이 그 기능을 알던 모르던 
os 제작자가 그런 기능을 넣어 둔 것인데 
그런 경우마다 새로 또 수정을 해야 한다. 

lab 님과 prajna 님  tok 님들이 
의존하는 내용이 아주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고 
무수한 사람들이 그것이 옳다고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그러나 상황이 바뀌면 상황에 맞게 
수정을 해야 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lab 님 이론에 의하면 
긴긴 시간 세계의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건과 역사 이야기가 
하나같이 다 망상분별 속에서 헤매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망상이 상속되고 이어져온 망상 시리즈라는 것인데 

그러나 어떻게 그 길고 긴 역사 이야기를 모두 
그렇게 쉽게 부정할 수 있는 것인가. 

과학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비록 과거에 진리로 믿었던 내용이 
시간이 지나 그것이 잘못임이 밝혀지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과학은 엄격한 진리성에 입각해서 
제시되는 지식들인데 
그것을 기본적으로 망상의 바탕에서 
제시하는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반해 lab님 자신이 주장하는 이론은 
또 오래 전에 확립된 이론이라며  
마치 그것이 정말 확고부동하게 옳은 내용인 것처럼 
제시하는데 

때로는 관세음보살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정정 사과 발언을 해야 할 경우도 있다고 해야 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해본다. 

처음에 윈도우 10 에 탑재된 엣지에서 글을 써보려고 하니 
글자 하나 입력하는데 
시간이 너무 걸린다. 

따지기가 힘들고 
그냥 되는 웹브라우져를 찾아서 
테스트 삼아서 글을 쓰는데 

안 되는 경우 
현실에 안 맞는 이론을 고집하지 말고 
자신이 현실에 맞추어 
변화를 해 나가야 된다고 보는 것이다. 

세상이 지금 어떤 시대인데 
그냥 주문만 하나 외우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현실에 임할 수 있는 것인가. 

아직까지 세균을 살생할 수 없다면서 
항생제 연고를 바르지 않는 lab 님의 자세는 
상당히 문제가 있는 자세라고 본다. 

그 자세로 담배를 피지 않아야 한다고 보는데 
세균들이 얼마나 담배를 싫어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8 글자 잘림현상이란 정말 오랜간만에 
대하는 특이현상이라 
글을 다 쓰고 나서 
또 시간을 내서 연구를 해보아야 하겠다. 



~~~~



연구를 마치고 살펴본 결과 

원인을 알아냈다. 


그것은 os 의 문제가 아니고, 

파일을 들여다 보는 

파일매니저 프로그램의 문제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문제가 없게 되었다. 


토털커맨더 프로그램의 설정 사항에서 

옵션에서 긴 글자 지원에 체크가 안 되어 있고 

짧은 글자로 표시에 체크가 되어 있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윈도우에서 폴더를 생성하면 

정상 작동이 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vhd 파일에 두번 설치는 했지만, 

그래도 원인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문서정보 ori http://story007.tistory.com/1097#7427
10gfl--2016-01월_댓글보전.txt ☞◆pvhp7427
θθ

 







◆vmby1635
◈Lab value 불기2560/01/07/목/11:49






○ [pt op tr] mus0fl--Etienne Daho - Week-End À Rome.lrc







♥ 잡담 ♥컴퓨터 시계의 오류

예매표를 예약하는 과정에서 
컴퓨터의 시계가 하루 1 시간 
앞 당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prince 님의 작업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 같은데 
잘못 기재된 날짜 시간도 수정하고 
시간을 다시 조정해서 살피니
하루를 앞서 산 셈이 되어서 마음에 여유가 생기지만, 
그러나 또 오늘 하기로 계획된 일을 하루 미루려고
생각하니 공연히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은 생각도 들고 
묘하다. 


prince 님의 something special 이론을 검토하고 
실상 논리의 논의를 계속 진행해야 하는데 

결국 실상 논리에서 그 오류를 지적하고자 하는 
내용은 prince 님이 갖는 그런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분별 내용이 대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실재의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는데 
그것을 논의하는 것이 
삶에 무슨 효용이 그렇게 많은가를 
늘 이 논의과정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복잡한 논의과정에서 
단순히 공리공론에 가까운 논의만 공회전을 반복하면서 
시간을 보내기 쉽다.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는 공한 실상을 
관해야 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그로 인해 현실에서 원래 실상의 상태와 상응하는 
니르바나의 상태에 머물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집착하는 내용을 대하면서 
그것을 잃어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을 갖고 
그것이 침해되면 또 그것이 침해되기에 
고통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 가장 근본되는 집착의 대상이  
자신과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등이라고 할 수 있고 
이로부터 수많은 집착의 대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 논리는 
이런 것을 잃어 버려도 
본 바탕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그 본 바탕에서는 
지금과 같은 현실의 생명이나 신체 등도 
무한히 다시 바꾸어 얻어 가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의 내용만 전부라고 잘못 판단을 갖고 임할 때는 
그 현실만 생각하고 집착하기에 
이런 내용을 지나치고 
아주 짧고 얕게 대충 관찰하고 판단을 하면서 
잘못된 선택과 행위를 행해 나가게 된다. 

마치 쟝발잔이 당장 빵을 훔쳐 배고픔을 면하고
그리고 붙잡히지 않으면 
그것이 삶의 방편이 된다고 단순히 생각하고 
현실에 임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빵을 훔친다는 이 비유가 하나의 생이라고 놓고 
그로 인한 결과가 다음 생에 무한히 이어져 나타난다고 
생각하면서 레미제라블의 소설을 감상하면 
그것이 이치에 맞다고 보아야 한다. 

왜 현실에서 가장 집착을 하게 되는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이나 신체 그런 것이 
모두 침해되고 사라진다해도 
무방하고 괜찮다고 말하는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늘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에 대해 침해받고 
자신이 죽고 무너지는 사태를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 침해되는데 
어떻게 마음 편하게 임할 도리가 있는 것인가. 

바다에서 일어난 물거품이 사라져도
물거품을 일으킨 본바탕이 되는 바닷물은 사라지지 않고 
그림자가 사라져도 그림자를 비춘 물체가 사라지지 않듯 
영화관의 스크린에 비추인 영화화면이 사라져도 
그 스크린이 사라지지 않듯,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감각현실과 관념 분별 
그리고 그 안에서 판단한 자신이나 자신의 생명 등이 
모두 사라져도 
그 본 바탕은 그런 생멸 생사와 무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본 바탕은 
또 다시 그런 것을 
다시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이렇게 매 생을 변화시키는 근본정신 역시 
영원불변한 본체로서 진짜 자신의 정체라고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삶의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나 근본정신은
현실에서 보는 자신의 생사나 생멸과 관계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청정한 실재 진여의 니르바나에 상응하게 
현실에 임하고 

다시 다음 생의 내용도 좋고 좋고 좋게 만들어서 
제한없이 다른 생명을 제도하고 
성불을 위해 무한한 기간 수행을 해나가는 
것이 수행자의 이후의 삶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1 겁이라는 시간만 놓고 보아도 
상상하기 힘든 긴 시간인데 
이 겁이라는 시간 단위를 가지고 
아승기라는 숫자를 표시해 나열할 수 없는 숫자로 세는 것이
수행자가 고려하는 수행기간이기도 하다.

수행이 완성된다고 해서 그것이 끝이 아니고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해되지 않는 그런 고려를 
하고 삶에 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바로 실상 논리의 문제와 관련이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대하는 내용들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가를
꿰뚫어 관하지 못하면,

당장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과
자신이 행하는 관념분별에
스스로 현혹당하고
그로 인해 스스로 사역당하고
다른 중생도 고통의 사역을 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 현상이 바로 현실에서
망상분별에 바탕해서 살아가는 중생들의
고통의 문제이기도 하다.  


수행자는 그런 잘못된 망상분별이 
잘못임을 이해하고 
현실의 정체에 대해 올바로 이해한 가운데 
길고 깊게 그리고 진실되게 
실상을 꿰뚫어 관하는 깊은 지혜를 
얻어서
자신도 니르바나의 상태에 이르고
또 다른 생명도 모두 다 함게 그런 상태에 이르게 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시간이 하루 앞선 셈이 되었는데 
이래도 같고 저래도 같다고 보고 
그냥 하루 앞서 계획된대로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공연히 남은 시간이라고 붕 뜬 상태로 
보내는 것도 조금 이상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서정보 ori http://story007.tistory.com/1097#1635
10gfl--2016-01월_댓글보전.txt ☞◆vmby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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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glp2009
◈Lab value 불기2560/01/06/수/22:04



○ [pt op tr]  mus0fl--Noir Désir - Le Vent Nous Portera.lrc


● 특별한 something special 이론에 대한 비판

거의 1 년간 작업한 내용이 이제
거의 마무리가 되었다고 본다. 

살펴볼 때마다, 보완할 점이 눈에 뜨이지만, 
그래도 많이 보완이 된 것으로 보인다.

prince 님이 스크립트에서 매번 버그를 방생하면서, 
개선버전을 내놓는데, 그래도 또 보완할 점이
보이는 것처럼
본인의 논문도 사정이 비슷하다고 본다.

이제는 무한동력사업을 떠나고픈 마음이 드는데,  
편하게 여기저기 다니려면,
조금 날씨가 풀려야 할 것으로 본다. 


 
prince 님이 새로운 something special 이론을 내놓았다. 

감각현실에서 이리저리 묶고 나누어 관념할 때마다 
새로운 관념을 일으켜 얻는 것은 
그 때마다 새로운 속성을 발견해서 그런 것이고,
그것은 감각작용에서는 그런 속성을 분별하는 기능이 없어서
그런 것일 뿐
없는 속성을 관념영역에서 엉터리로 망상적으로 
만들어 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그 주된 내용이다.
 

자신이 감각현실을 얻는 가운데 그에 대해 
관념분별을 행하게 되는 것이므로, 
자신이 관념분별로 얻는 내용이 
감각현실에 그대로 있다고 여기는 것이 
망상분별증세의 한 부분인데, 

이것이 심하면 실재에도 또한 사정이 그렇다고까지 
나아가게 된다. 


본인이 비유로 
손바닥을 부딪혀 소리가 날 때 소리의 내용을 손바닥에서 
찾아낼 수 없다고 비유하였는데 
물론 비유는 논증 수단이 아니고, 
단지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빌리는 설명방안에 불과하다. 

여하튼 이 비유를 놓고 보면 
prince 님의 주장은 
본래 손바닥에는 소리가 숨겨져 있는 것이었는데, 
손바닥은 소리를 알지 못하고 있던 것이고  
이제 소리가 나서 그 소리로 인해
손바닥에 소리가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라는 설명이 된다. 

비유는 어디까지나 비유이므로, 
더 이상 논의하지 않기로 하고 
본 문제를 살펴보자. 


이제 prince 님의 주장을 받아들일 때는 
관념분별로서, 감각현실에 들어 있는 내용을 그렇게 찾아낸 것이 된다. 

이 때 감각작용은 감각현실 안에 그런 내용이 본래 있다고 해도
그런 내용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은 별도로 하고, 
관념분별작용만은 감각현실에서 그런 내용이 있다는 것을 찾아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관념분별은 감각현실 안에서 그 내용을 찾아 내야 하는데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고
관념 분별로서 찾아냈다는 그런 내용은 
여전히 관념 분별 영역 안에 있는 내용인 것 뿐이다. 

이 점을  prince 님은 혼동을 일으키는 것으로 본다. 

자신이 감각현실을 대해
이 부분 저부분을 묶고 나누어 분별함에 따라
관념을 일으켜 가지면 
그런 내용은 관념 영역에서 얻어내는 내용인 것인데 
그런 내용을 얻고
그것이 감각현실에서 마치 얻어낸 내용인것처럼
혼동을 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자신이 이 부분과 저 부분을 묶어 관념하면 
그것이 어떤 기능을 갖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전까지는 미처 알지 못한 그런 속성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자신이 이 부분과 저부분을 묶는다고 생각한 것은 
자신의 생각이지, 
자신의 생각에 따라 그런 감각현실의 이 부분과 저 부분이 
묶이거나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를 놓고 자신이 유리 부분만 묶어 생각한다고 해서 
자동차에서 유리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고 
자동차 전체로 묶어 생각한다고 
자동차 전체로 묶이는 것이 아니다. 

각 부분이나 전체가 어떤 기능을 갖고 
어떤 속성을 갖게 되는가는 둘째로 하고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의 감각현실은 관념작용에서 행하듯
그렇게 묶이고 나뉘어서 얻는 것이 아니고
전체로 얻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감각현실을 놓고 
자신이 이렇게 묶고 저렇게 나누어가며 분별할 때마다, 
그 부분은 자동차다 
그 부분은 바퀴다. 그 부분은 유리다. 
이런 식으로 관념을 갖게 된다고 할 때 
그 때마다 그런 내용이 그 부분에 있게 된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이것은 관념 영역에서의 일이라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던지 말던지, 
감각현실은 감각현실 그대로인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각 부분을 나누고 묶을 때마다 
어떤 속성을 새로 찾아내게 된다고 해서 
그것이 감각현실에서의 일이라고 여긴다면, 

이제 그런 관념을 갖게 되면, 
감각현실에도 또 하나의 그런 내용이 있음을 
찾아낸 것이 되어야 하는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이런 문제점을 문수보살님은 
그렇게 되면 문수보살님이 둘이 된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둘이 되면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하고 생각하기 쉬운데 
prince 님이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그것이 감각현실에도 하나 더 있어야 하니 
매번 둘이 되어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게 무언가 찾아냈다는 것은 
그처럼 또 망상을 관념영역에서 하게 되었다는 사정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 뿐이다. 


또 하나 근본적으로 다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해야 쉽다고 보고 
비유를 들어 보자. 

모니터에서 북을 치는 모습이 보이고 
스피커에서 소리가 난다고 할 때 

모니터 화면에서 막대가 북을 두드리기에 
스피커에서 소리가 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인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모니터 화면에 각 색소가 이렇게 변하고 
저렇게 변하는 일이 
왜 스피커의 소리를 내겠는가. 

prince 님이 감각현실을 이렇게 묶고 저렇게 나누어 
분별함에 따라 그것이 이런 기능도 갖는 것을 
찾아낸다고 하는데 

그런 감각현실이 그런 기능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망상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다음 그림을 보고 이해하면 이해가 쉽다.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2 라는 사람이 얻는 감각현실은 
5 ^ 안에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5 ^ 라는 시각영역안에 얻어진 내용이 
그것이 소리를 낸다고 이해하면 옳은가. 

또 5 ^ 라는 영역에서 본 자동차가 
달리다가 무언가에 부딪혀 무엇을 부셨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5 ^ 안의 내용을 부셨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보이고 
그것을 그렇게 관념분별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속에서 해석하는 인과관계의 해석이라면 
해석인데 
그것을 통해서 어떤 것이 갖는 기능이나 작용을 
해석하게 되기에 
이 부분을 잘 살펴야 한다고 본다. 

자신의 시각정보가 청각정보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시각정보가 촉각정보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매번 그렇게 이것 저것을 묶고 나누어서 
그것이 그런 작용을 일으킨다고 
분별하지 않는가. 

자신이 묶고 나눈다고 해서 
감각한 부분이 그렇게 묶이고 나뉜 적도 없는데 
관념 영역에서는 열심히 그렇게 나누고 묶고 
그 일부분의 내용이 자신이 일으킨  또 다른 망상과 
그런 관계를 갖는다고 망상을 전개해나가는 것 뿐이다. 


우리는 위 그림에서 본다면, 
이런 시각정보가 그런 기능을 갖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시각정보 등을 얻게 한 실재는 그러면 
무엇인가를 추리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관념과 감각현실과의 상호관계를 논의하는 
형식은 이 실재와의 관계에서의 논의에서도
같은 형태로 문제된다. 

이 경우 
감각현실에서 얻은 내용을
실재에서도 얻을 수 있는가. 

관념영역에서 분별한 내용을
실재에서도 얻을 수 있는가부터 따져야 한다. 

자신이 감각현실에서 A 를 얻을 때 
그러그러한 이유로 실재도 그에 비례한 무엇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이들 상호관계를 밝힐 어떤 근거가 되는 내용을 하나라도
실재에서 얻어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이를 바탕으로 주장을 내세워도 내세워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최소한의 하나의 내용도 
얻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모니터와 스피커의 비유로 다시 돌아가보자. 

화면을 볼 때는 
모니터에서 북을 막대기로 두드리는 모습을 보고 
스피커 소리를 듣기에 

막대기를 보여주는 모니터 화면이 
스피커 소리를 내는 작용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마련이다. 

모니터 화면도 이 부분 저 부분이 나뉘고 묶이지 않지만,
자신은 관념 분별로서 막대기로 보는 부분을 하나 나누어 묶고
북으로 보이는 부분은 그 부분대로 나누어 묶어서 

막대기 부분이 움직여서 북 부분을 두드리니, 
스피커에서 소리가 난다라고 
생각하면서 
보고 듣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과연 옳은 해석이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모니터 비유를 비유로 설명하면 
다시 이런 의문을 가질 것이다. 

모니터 화면에 비추이는 북은 
그런 화면을 찍을 당시 
현실에서 북을 두드린 것이 아닌가. 
또 그 북이 그런 소리를 낸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이 비유는 
우리가 현실에서 대하는 그런 감각현실이 
이 모니터의 화면과 같다고 비유로 드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다시 의문을 갖는 내용은 
그런 감각현실을 얻게 한 그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가 어떤 것인가하는 내용이 다시 의문이 된다고 본다. 

그런데 처음 자신이 행한 관념분별 내용이 
감각현실에서 얻어지지 않음을 이해하는 이는 
실재의 내용에 대해서도 그렇게 함부로 나아가지 않는다. 

관념분별로 가진 내용이 감각현실에조차 얻어지지 않는데 
다시 실재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할 것이 무엇인가. 

시각 정보는 청각 정보에서 얻어지지 않는데 
그것을 실재에서는 얻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prince 님의 입장을 취할 때는 
이와는 반대가 된다고 본다. 

자신이 이런 감각현실을 얻고 
또 자신이 그에 대해 그러그러한 관념 분별을 행할 때는 

감각현실에 있는 내용을 자신이 찾아 낸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내용들이
감각현실로 얻어지고
자신이 관념분별을 통해 찾아내는 것은 

다시 실재도 그러그러한 내용으로 있기에 
그런 내용이 감각현실로 얻어지고
또 자신의 관념분별을 통해 찾아내게 되는 것이라고
다시 망상분별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러나 도대체 어디서 그것을 찾아내고
얻어냈기에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인가. 

prince 님이 주장한 내용은 
정작 문제되는 영역에서는 하나도 찾아내지 못하고 
모두 관념 영역에서 찾아낸 것이다. 

일전에 prince 님이 
자신이 과거에 얻은 감각현실을 
지금 순간에 되살려내지 못하지만, 

지금 대하는 감각현실이 
과거에 얻은 감각현실과 동일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고 
할 때에도 

사실은 이런 분별을 관념영역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행한 것이다. 

그래서 엄격히 판단할 때 prince 님은 
자신이 어떤 감각현실이 다른 감각현실과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할 근거를 하나도 갖지 못하는 상태에서 
매번 관념 영역 안의 내용을 가지고 
그것이 다른 것과 동일하다거나 다르다는 등으로 
망상분별을 계속 전개시키는 것 뿐이다. 

그것이 망상분별 안의 내용이므로 
그 영역에서는 그렇게 주장되는 것이지만, 
그 내용을 감각현실에 가지고 들어가면 안 되고 
더욱이 실재 영역으로 가지고 들어가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럴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 영역에서 만들어가진 내용들 뿐이다. 


노래를 듣다보니 자꾸만 왜 내방에 
무례하게 폭 들어오는가 하고 항의하는데 

prince 님은 
열쇠를 하나 엉터리로 관념분별 영역에서 얻었다고 하면서 
감각현실 영역과 
실재의 영역에도
그것이 통용이 된다고 여기고
마구 들어가려고 하는 문제점이 있다고 본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정말 노래 내용처럼 
관세음보살님이 반야심경에서 잘못된 내용을 
제시한 것이 되므로 
사과를 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 

중론송이나 반야경전이나, 
중생들이 대부분 이처럼 생각을 하고 
자신이 행한 관념분별 내용이 
실답게 감각현실이나 실재에도 그대로 있다는  
전도 몽상을 일으키고
또 그에 집착을 일으켜 행위해나가므로 

이것을 시정해주기 위해 
그렇게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일체고액의 원인이고 
공포의 원인이고 
고통의 원인이기에 
또 그런 망상분별을 제거하고 
그에 바탕한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실재의 내용이 얻어지지 않지만, 
그것은 또 전혀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그 실재의 내용도 
다른 감각현실이나 관념 분별의 바탕이 되는 것일뿐 
그 역시 
영원불변한 실체나 본체가 아니고 
따라서 진짜의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무아, 무자성, 인무아, 법무아, 승의무자성, 공의 
가르침이다. 

실재라고 표현하기에 그것은 진짜고 
감각현실은 가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고 
이들이 모두 무아, 무자성이므로 
이 모두에 대해 집착을 일으켜 갖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다만, 관념 분별을 통해 
제기하는 그 모든 고통의 문제는 
그것의 본 바탕이 된다고 보는 
실재나 감각현실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어낼 수 없는 것이고 
그렇기에 이들 실재나 감각현실은 
그런 생사 생멸 고통을 얻을 수 없는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바탕이 되는 측면의 내용을 취하고
망상분별의 내용을 실답지 않은 망상분별로 올바로 이해하고 
망상분별에 바탕한 집착과 그로 인한 행위로 인해 
또 다시 그 본바탕에서 얻지 못하는 고통을
자신의 행위를 통해 망상분별 안에서 증폭시켜 나가는 것을 중지하고 
본 바탕의 청정한 실상 니르바나의 상태에 상응하게 
여여한 상태로 평안하고 안온하게 머무를 것을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망상분별고 어리석음(무명)을 바탕으로 할 때는 
매번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나 감각현실에는 
없는 고통을 
그의 망상분별과 탐욕 분노 어리석은 견해의 집착에 바탕하여
일으키는 뜻, 말, 글, 태도 행위의 신구의 삼업을 를 통해 
그가 반복해서 받아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실상에 관한 논의의 효용으로서
고통을 제거하는 효용을 바로 얻자면 
prince 님이 주장하는 내용을 거꾸로 곧바로 취한다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즉 그런 내용들이 하나같이 실답다고 할 때 
고통도 실답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그 실다운 고통을 제거하려면 
역으로 그렇게 실다운 것들이라고 보는 것에 대해 
오히려 그것이 
실답지 않다고 여기고
집착을 벗어나
고통을 받게 하는 그런 생각 및
그에 따른 행위 반응을 바꾸어 행하는 것이 
그 실다운 고통을 받지 않게 하고  
제거하게 하는 방안이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사실 어느 주장을 취해도 
그런 고통을 제거할 수행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을  
결론으로 얻는데 큰 문제는 없다고 본다 .

그러나 진리판단의 차원에서 볼 때 
그것이 하나같이 실다운 것이 아니므로 
그에 대해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는 것은 
또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다. 

이치에 맞지 않는데도 
자꾸 그렇게 집착하게 되므로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런 사실을 깨달아서 
현실에서도 매 경우에
그렇게 행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수행의 핵심사항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prince 님이
관세음보살님께 잘못된 전도 몽상에 바탕해서 
사과를 요청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하고 

아울러 본인과 tok 님에게 
집단으로 반성이나 사과를 요청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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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gfl--2016-01월_댓글보전.txt ☞◆vglp2009
θθ
 


◆pswk1349
◈Prince evilstupidmiserable Little 2016/01/05/화/23:16



 



○ [pt op tr]  mus0fl--Laura Mayne - L'Air Du Vent.lrc


○ 새로운 something special 이론 

lab 님이 손바닥을 부딪혀 소리가 날 때 
그 소리를 손바닥에서 찾는 것이 엉뚱한 것처럼 
또는 그림자가 비추일 때 그 그림자에서 
그 사물이나 사람을 찾는 것이 엉뚱한 것처럼 

감각현실에서 관념을 일으킬 때 
그 관념의 내용을 감각현실에서 찾는 것이 
엉뚱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비유의 오류가 들어 있다고 본다. 
비유는 비유의 상황에서는 그런 것 같지만, 
현재 문제삼는 내용에는 해당이 없는 것이다. 

물에 있는 오리가 하늘을 날듯 이런 비유를 들어 
코끼리도 하늘을 날아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가 책상을 보면서 그것을 책상이라고 생각하다가, 
그 책상 안의 나무를 보면 또 나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처럼 어떻게 구분지어서 생각하는가에 따라 
각기 그에 대해 관념을 달리갖게 되는데, 

이런 사정으로 인해 
전체가 갖는 속성은 부분이 갖지 못하고 
부분이 갖는 속성은 전체가 갖지 못해서 
매 부분마다 일으키는 관념이 갖는 속성은 
전혀 근거가 없이 엉뚱하게 그 때 그 때 만들어 갖는 것이라고 
tok 님이 비판한 바 있다. 

10 명의 사람이 힘을 합치면 어떤 물건을 끌어 올릴 수 있는데 
그러나 1 사람은 그것을 끌어 올리지 못한다. 

10 명이 합치면 갖는 속성은 
1 명에게는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사실 1 명이 갖는 속성이 그렇게 합쳐져서 
10 명이 될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각 구성부분이 합쳐져서 하나의 물체가 되고
기능하는 경우로는 집이나 자동차나 사람의 신체 등도 
사정이 같다. 

집에서 누어 잔다고 할 때 
그러나 집을 구성하는 천장에서 잘 수는 없다. 

자동차는 달릴 수 있는데 자동차에 달린 의자는 
달리지 못한다. 

이처럼 각 부분에 대해 파악하는 속성은 
어떻게 부분을 나누어서 대하는가에 따라 
그 때 그 때 달라진다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각 부분을 어떻게 나누고 묶는가에 따라 
속성이 달리 파악되는 것은 
그 각 부분이 합쳐지는가 그렇지 않고 
따로 기능하는가에 따라 
기능이 발휘되기도 하고 
발휘되지 않기도 하는 문제이지, 

단지 관념 영역에서 이리저리 묶고 나뉨에 따라 
엉뚱한 망상을 일으키는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어떻게 보면 관념을 갖는다는 것은 
감각현실에 들어 있지만, 
감각 영역에서는 그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는 속성을 
찾아내는 작용을 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자동차 유리가 망치에 부딪히면 깨진다는 속성은 
그냥 자동차에 달려 있을 때는 발견되지 않는 속성이지만, 
그 상태에서도 그런 속성을 갖고 있는데 
망치에 부딪힐 때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망치에 부딪힐 때 그런 속성을 망상으로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많은 군인이 모인 군대는 힘을 갖는데 
군인 하나는 힘이 없다고 하는 경우에도 
군인들이 많이 모여서 갖게 되는 속성을 
그렇게 찾아내는 것이지, 
하나의 군인에서는 없던 속성을 
많은 군인을 대하는 순간 망상으로 만들어 얻는 것이 아니다. 

많은 점으로 글자나 그림을 그릴 때 
이것을 모아서 보면 글자나 그림이 되지만, 
그 점 하나하나는 그저 점이라고 하는 경우도 사정이 같다. 

결국 tok 님이나 lab 님이나 
하나의 바탕화면으로 얻는 감각현실을 놓고 
관념 영역에서 이리저리 묶고 나눌 때마다 
각기 새로운 관념을 이리저리 망상을 일으켜 얻어낸다고 하면서 
이것이 마치 손바닥을 부딪히면 소리가 일어나는 것과 같아서 
손바닥에 그 소리가 없는데 그러나 소리를 얻어낸 것처럼 제시하지만, 

관념이란, 감각현실에 들어 있는 속성을 
그렇게 이리저리 묶고 나누어가면서 
그것을 발견해내는 작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책 한권을 떨어뜨려 유리를 깨지 못한다고 할 때 
책을 열권 묶어 떨어뜨리면 유리를 깬다면, 
열권을 묶어 관념해서 유리를 깬다고 망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한 권일 때는 찾아내지 못한 속성을 
열권을 묶어서 관계를 파악할 때 발견하게 된 속성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10 권에서 갖는 그 속성은 
물론 그 10 권을 구성하는 각 부분에서 파악되지는 않지만, 
10 권을 묶은 그 부분에서는 다시 파악됨을 그렇게 
제시하는 것이다. 

이 경우 그 속성이나 
그 부분에 대해 성립시키는 관념은 
감각현실에서 그런 관념을 갖게 할 만한 내용인 것이지, 
엉뚱한 망상이 아니다. 

이 경우 관념작용은 감각작용에서는 그런 속성이 있어도 
그것이 있고 없음을 감각이 파악하지 못하기에 
마치 감각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인 것처럼 
lab 님이 제시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감각작용의 특성이 그런 것이고 
감각현실에 들어 있는 그런 속성을 찾아내는 
관념 작용이 엉뚱한 망상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과거의 본인의 something special 이론은 
막연히 그 감각현실이 다른 부분과는 분명 무언가 다른 것으로서 
그런 관념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했다면, 

이번 something special 이론은 
감각현실은 감각작용이 그 안의 속성을 분별하는 
기능이 없기에 그런 것일 뿐, 
그 안에 그런 속성이 들어 있었던 것이고 
관념은 그것을 찾아내는 작용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이전 something special 이론과 약간 차이가 난다고 본다. 



스크립트를 다양한 시스템 상황에서 
사용자 편의에 맞게 
사용할 수 있게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제는 그런 사용자 설정상황을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불만을 제기한다. 

본인이 작성한 스크립트가 늘 같은 상황에서만 
사용한다면 본인이 일률적으로 
미리 다 내용을 정해서 스크립트를 작성할 수 있겠지만, 
사용자마다 다 취향도 다르고 
시스템 사정도 다르기에 
어쩔 도리가 없다고 본다. 

조금 개선안을 생각해보기는 하는데 
사용자가 일부로 설정을 다르게 하지 않는 한,
기본 옵션으로 모두 적용되게 하는 방안을 하나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스크립트를 본인이 작성할 때는 
본인의 시스템에서 그런 기능을 잘 하도록 구성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이상한 보고를 받는 것은 
그것이 망상때문인가?

그런 경우에 그런 속성이 파악되는 것은 
사실은 그것이 원래 그런 속성을 가졌는데, 
그런 경우에 발견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tok 님과 lab 님의 집단 반성을 요구한다. 


문서정보 ori http://story007.tistory.com/1097#1349
10gfl--2016-01월_댓글보전.txt ☞◆pswk1349
θθ
 


◆vvod2558
◈Lab value 불기2560/01/04/월/19:02



○ [pt op tr]  mus0fl--Eddy Mitchell - Il ne rentre pas ce soir.lrc


♥ 잡담 ♥영화의 감상방법과 실상논리

prince 님을 과거에 little 님으로 표현했는데, 
지금은 much 또는 big 으로 표현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매번 손바닥을 서로 부딪히면 소리가 난다고 
생각하는 이가, 
그렇다고 그 소리를 손바닥에서 찾아내려고 하면 
찾을 수 있는가. 
손바닥이 소리를 낸다고 
손바닥의 모습을 소리와 같다고 여기면 될 것인가. 

실재 - 감각현실 - 관념 - 좋고 나쁨의 문제를 
살필 때 이들이 모두 이렇게 서로 엉뚱한 내용들이라고 

베개와 꿈에서 본 곰의 모습을 비유로 드는 것인데, 
매번 베개를 베면서 곰의 꿈을 꾸면 
그로 인해 베게가 곰이 될 것인가. 

이처럼 엉뚱한 관계지음은 
현실에서 모두 엄밀하게 관찰하면 
살필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감각현실을 단일하게 감각현실이라고 묶어 제시하지만, 
감각기관별로 여러 종류의 감각내용을 나열할 수 있는데 
꽃의 모습을 대해 꽃의 향기를 얻는다고 
그 향기를 그 꽃의 모습과 비례한다거나 비슷하다고 
추리할 수 있는가. 
나머지 내용도 다 사정이 같다. 

하얀 색의 무언가를 맛보고 단 맛도 느끼기도 하고 
짠맛도 느끼기도 하고 
비린 맛도 느끼기도 하고 여러가지 인데 
자신이 그 하얀 설탕이나 소금이나 조미료를 맛보고 
그런 맛을 얻었다고 
이것을 그 색깔에 투영시켜서 그 맛이 그 색에 있다고 
주장하면 이치에 맞는가. 

이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데, 
어떻게 자신이 현실에서 감각현실에서 그런 관념을 매번 얻는다고 
그것을 감각현실에 있다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 실재도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오늘날 과학은 자신이 노랑색으로 보는 것은 
사실은 자신에게 노란 빛을 반사시켜주는 것일 뿐 
그것이 노란 것은 아니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신경의 흥분과정으로 설명하는데 
신경의 흥분이 왜 종국적으로는 자신이 보는 노란 색이라고 보는 그런 내용으로 되는가. 
이것을 하나하나 설명하자면 결국 원래 그런 내용을 전해준 것으로 보는 
그것은 자신이 얻은 내용과는 동떨어진 내용이라고 추리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옥상에서 동방으로 갠지스강의 모래 알 수처럼 멀리 떨어진 불국토에 계시다는 
보성여래님께 문안을 드리면서 
인도에서 처음 행하는 문안 인사방법이 한국에서는 
절을 드린다는 형식으로 변화된 것처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다보면 
혹시 사마귀가 발을 들듯
자세를 취하는 것이 그곳의 인사법이 아닐까
그리고 그곳의 부처님은 형상이 바뀌고 바뀌어
사마귀 형상으로 계시는 것은 혹시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는데 
경전에서는 사정이 사실 이렇다는 내용을 
보게 된다. 

그 몸 크기가 지구만한 분도 계시기도 하고 
또는 작은 분자 정도의 크기 만한 분도 계시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용이 달라지면 
문화충격을 받게 되기 마련인데 
그러나 본인이 108번째 게송으로 외우는 내용에 

如一如是一切佛,  如一如是一切身,

如一如是一切頭,  如一如是一切舌,

여일여시일체불,  여일여시일체신,   

여일여시일체두,  여일여시일체설,

이런 내용이 나온다. 

그것은 엉뚱한 망상분별에서는 수많은 종종 차별의 
분별을 행하지만, 
그것이 사실은 하나의 베개를 베고 
매번 가지가지 희안한 꿈을 꾸어 대는 
중생의 망상분별에 의한 것이지, 
베개에 그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 사정을 
뜻하는 것이라고 본다. 



왜 그렇게 매번 엉뚱한 내용을 얻어 갖게 되는가는 
이전 글에서 말했듯, 그 사정을 
별들에게도 물어 보고 
눈에게도 물어보고 
마음에게도 물어 보기는 보는데 

이것이 소리가 났다고 
손바닥에게 그 사정을 물어보고 
깨진 그릇들에게 그 사정을 물어보는 것과 
상황이 비슷하다. 

prince 님이 자신의 사정만 자꾸 반복해 
고집하기에 그렇지 
매번 다양한 암파리들을 만나 대화를 하는 
mun 님은 사정이 본래 그렇게 조금씩 엉뚱함을
잘 이해하는 것이다. 

mun 님이 데이트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것은 
자신이 배출하는 그런 쓰레기 들을 
암파리들이 대단히 환희하면서 좋아한다는 점이 
주된 이유이기도 한데, 
어떻게 그런 것을 쉽게 만들어 내는지 
정말 대단히 흠모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면서 
따른다는 것이다. 

생각하면 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어떡하라는 것인가. 

우리가 논의를 하려면 
정확하게 논의를 해야 한다고 본다. 

A 와  B의 같고 다름이 문제되어 
논의를 하는 입장이라면 
논의하는 그 상황에서 
문제되는 그  A 와  B를 확보해 놓고 
그것을 비교하던지 겹쳐서 놓아 보던지 하면서 
그것의 같고 다름을 따져도 따질 일이 아닌가. 

지금 대하는 감각현실이 과거에 얻은 감각현실과 
같고 다름이 문제되면 
그것도 사실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명탐정이 아니라고 해도 
상식적인 입장인데 
매번 엉터리 사진이나 몽타쥬 그림을 하나 딸랑 들고 와 
그것이 자신이 과거에 얻었던 감각현실의 내용이라고 하면서 
지금 얻는 모습과 같다거나 다르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나뭇꾼 신선 희롱 사건의 
핵심적 내용인 것이다. 

자신이 도끼를 하나 빠뜨리고 나서 
신선이 나타나 
금도끼를 들고 와 이것이 네 것인가 물으면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이처럼 온갖 도끼에 대해
그것이 자신이 빠뜨린 도끼와 같은가 다른가를 물으면 
매번 잘 모르겠다고 말할 때 
정직함을 인정받을 수 있는 법인데,
이것은 무엇이 같고 다른가를 논의할 때 
유지해야 하는 기본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야기에서는 쇠도끼가 자신의 것이라고 
마구 억어지 주장을 해서 
신선이 이런 억어지 주장을 하는 나뭇꾼에게는 
도끼를 몽땅 안겨주어서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방안이 최상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나뭇꾼은 진리 문제를 깊이 있게 따지는 입장이 
아니어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엄격히 진리문제를 논의해야 하는 연구원이 
시종일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면 
다 그런것이다라는 주장만 반복한다면 
그것이 무슨 논의인가. 

그냥 자신의 희망하는 내용만 죽 적고 
세상이 그렇다라고 하면 끝 아닌가. 

적반하장이란 말은 이런 경우에 
사용해야 할 말이라고 보는데, 
자신이 억어지 주장을 몇십년째 반복하면서 
그것이 마치 본인의 책임인 것처럼 
거꾸로 주장을 하는 것이다. 

사실 곡을 선택하는데 
prince 님이 선택해 놓은 곡이 또 선택되어서 
조금 놀랐다. 

random 인데 이렇게 똑같은 곡을 
두번 뽑아내기도 하는가. 
그런데 생각해보니, 지금 그런 같고 다름을 분별하기 곤란하다는 
사정을 말하는 본인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을 문제삼지 않아야 할 것도 같다.

여하튼 두번 씩 비슷해 보이는 곡을 올려 놓기는 그렇다고 보고
다시 선곡해서 올리는데, 

생활의 문제와 진리판단의 문제는
무관한 것이 아니다.

영화감상을 이야기할 때 
그 과거의 배우의 그 후 모습이라고 
관련자료를 올렸는데
어떻게 이들이 서로 같은 인물이라고 보는가. 

여기서 이 각기 다른 인물을 동일인물로 보아야 한다면, 
정말 암파리를
석존 당시 미모가 뛰어나 유명했던
암발리 여사로 보아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본인도 
과거 어느 순간 행방불명된 어린 아이를 
찾아 나서야 할 이유도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런 억어지 주장을 할 때도 
무엇때문에 이 각기 다른 인물이 서로 같은 동일 인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본다.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하는 분들이 
다 그런 것을 찾을 수 없기에 
결국 무아 무자성을 선언하는 것인데 
그런 것이 있다고 한다면, 
시방 삼세 일체 부처님이 다 뒤짚어져야 할 내용이라고 본다. 

물론 중생의 망상분별 상태에서는 
그렇게 망상을 일으킨다는 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후는 그런 이해를 통해서 
공연한 망상분별 집착을 일으키지 말고 
고통의 윤회를 밟아 나가지 말고 

또 과거 천년 전 빌려 준 돈을 
오늘날 본인에게 청구하는 노력도 그만 포기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꿈과 같고 영화와 같은 현실에서 
매번 좋은 영화를 즐겁게 유익하게 아름답고 선하고 가치있게 
감상하면서 매번 다른 영화관을  
돌아다니면서 관객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는 방안이기도 한 것이다. 

이 비유를 잘 이해해야 되는데, 

현실이 영화관과 같은데 
매번 영화관에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 
상영되는 영화를 진짜 상황이라고 망상을 일으킨 다음 
고통에 신음하고 
또 그 상태에서 찾아들어가는 또 다른 영화관은 
그 후속 공포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이 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것이 영화를 영화로 알고 감상하는 이에게만 
공포와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지, 
나머지 대부분 망상분별 환자들에게는 
정말 진짜처럼 여겨지는 4D 공포 고문 영화관인 경우가 
대단히 많은 것이다. 
오죽하면 영화 상영 시간 내내 관객들 대부분이 
비명에서 시작해서 비명으로 끝나면서
영화관을 나오겠는가. 

배고픔과 추위를 말하는데 
그것이 4D 영화관의 특성인 점도 
미리 잘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영화를 잘 관람하는 방안은 
물론 비유인데, 

그 비유를 통하여 
매 생 맞이하는 현실의 내용이 
자신이 원하는 상태에 부응하게 되는 방안을 
잘 연구해서 실천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곧 수행방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첫번째 항목은 
영화가 영화라는 것을 잘 음미하고 이해하고 
그 바탕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다. 

이것을 좀 전문용어로 말하면 
영화관람시에는
본래 청정한 스크린 실상에 상응하게
영화내용에 물들지 말고 
여여한 상태로 임하여서, 


그런 가운데 관람을 하더라도 하고, 
주변에 경기를 일으키는 관객이 발견되면 
응급조치도 잘 행하고 
영화의 본질이나 취지도 잘 이해시켜 안정을 시키고 
그런 노력을 종합적으로 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팝콘만 잔뜩 앞에 쌓아 놓고 
잠만 잔다거나, 
영화내용이 마음에 안 맞는다고 
스크린을 찢거나 
화면에 돌을 던지거나, 
영화에 출연한 배우나 
감독을 직접 찾아가 항의한다거나
그런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면, 

다음 영화 관람시에도 모두 
반영이 되어 
점점 이상한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하게 된다는 사실도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문서정보 ori http://story007.tistory.com/1097#2558
10gfl--2016-01월_댓글보전.txt ☞◆vvod2558
θθ
 


◆pfcf1563
◈Prince evilstupidmiserable Little 2016/01/04/월/17:17



○ [pt op tr]  mus0fl--Michel Sardou - LE BAC G 84.lrc


♥ 잡담 ♥sound of music
 
새해를 맞이하여 영화 sound of music 을 
보았다. 

이 영화는 아주 꼬마일 때 보았는데 
매번 영화 줄거리를 알면서도 다시 보면 
감동을 준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던 시대 배경에서 
폰 트랩일가가 스위스로 탈출하는 영화인데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일상에서 곧바로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재주를 갖고 있었고 
나중에 미국에서도 그렇게 가족 공연단을 만들어 
활약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배경이 없다면, 단지 노래를 잘하는 수녀가 
부유한 명문가의 대령과 결혼해서 잘 살았다 
이 정도의 스토리가 되었을텐데 
그런 시대배경이 무언가 더 감동을 주는 요소로 
작용하지 않는가 생각한다. 

여주인공을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햅번과 자꾸 헷갈리는데 
요즘은 인터넷의 도움을 쉽게 받아 
모든 기본 정보를 쉽게 얻게 된다.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그 이후의 소식이 
다음 페이지에 잘 정리되어 있다. 
http://blog.naver.com/ginnie_eng/70158265107

여주인공은 쥴리엔드류스인데 
수녀원에서 climb every mountain 을 부르는 
수녀원장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를 해준다고 본다. 

사운드오브뮤직에서 

You are sixteen going on seventeen, baby it's time to think

라는 노래도 나오는데 

mun 님이 
You are sixty going on seventy, baby it's time to think
로 가사를 고쳐 부른다. 

본인의 노래 선곡 스크립트가 신기를 획득한 것 같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오늘 노래를 선곡하니 
노래 가사에 그런 의미도 있지 않는가 생각된다. 
1719 년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17 세 19 세 무렵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경에 보면 에노스는 905 살을 살았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본인의 자동 텍스트 읽기에 의해 검출되어 나온 내용이라, 
정확히 어떤 구절에서 나온 것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사운드오브뮤직을 보던 어린 시절이 지금도 생생한데 
정말 mun 님의 말대로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 것을 느끼게 한다. 


lab 님이 마치 현실에서 생멸과 생사를 보지만, 
그러나 본래 실재에는 생멸과 생사를 얻을 수 없고 
이것은 꿈과 같이 실답지 않는 내용인 것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그런 생멸과 생사를 얻을 수 없는 실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도무지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것은 혹시 아닌가. 

대신 우리는 매일 눈을 뜨면 
현실을 맞이하는데 
이 현실 속에서 늘 생활해나가야 한다. 

현실을 대해 살아가는 입장을 
마치 꿈 속에서 베개를 붙잡고 
곰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표현하지만, 
현실은 매번 정연하게 나타나고 
나 자신이 해를 해로 볼 때 
그 해라는 감각현실은 
다른 감각현실의 부분과 분명 같지 않은 
무언가 특별한 부분인 것이다. 

또 매번 눈을 떠서 이런 모습을 볼 때, 
그런 모습으로 보이는 것은 
실재도 그에 상응한 무언가 특별한 것이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추리라고 본다. 

사람이 생사를 겪으면 실재도 그런 무언가의 
특별한 내용이 거기에 있으므로 그런 내용을 
겪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마치 그런 내용이 전혀 없는데 
단지 상상과 망상을 통해 그런 내용을 
겪는 것처럼 제시하면 
많은 사람을 오히려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보게 된다. 


현실에서 얻는 감각내용과 관념이 
최종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이를 통해 우리가 좋고 나쁨을 경험한다는 데에 있다고 본다. 

무엇이 무엇이다를 아무리 반복해 음미한다해도 
그것이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좋음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또 별 의미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좋음을 
마치 단순히 시감상만 바꾸어서 
행하면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제시하지만, 

그러나 추위에서 시감상만으로 따뜻함을 느낄 수 없고 
배고플 때 시감상만으로 배부름을 느낄 수 없고 
춥고 배고플 때 좋음을 얻는 것도 곤란하다. 

그래서 추위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끊임없이 현실에서 노력을 하는 것인데, 
이것이 마치 잘못된 분별로 인해 
스스로 고통을 불러들이는 활동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비록 그런 활동이 일부분 그런 결과를 불러 일으키는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지나친 해석이라고 본다. 

실재의 내용을 붙잡고 
현실의 내용을 모두 그와 유사한 형태로 시감상을 
계속 행하면, 
추위도 겪지 않고 배고픔을 느끼지도 않고 
또 다음 생도 더 좋은 형태로 계속 
맞이할 수 있게 된다고 하지만, 
당장 추위와 배고픔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방안이 
어떻게 무한한 생의 추위와 배고픔은 해결해주는 방안이 
되는가. 

꿈에서 본 곰은 베개에는 없고 
감각현실을 대해 생각하는 내용은 
감각현실 안에서 찾을 수 없다고 하지만, 
일정한 감각현실이 매번 일정한 관념을 일으킨다는 사정은 
그것이 서로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고 본다. 

물론 lab 님은 여기에 대해 다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감각현실에서 이부분과 저부분이 다르다 같다는 내용도 
사실은 감각현실 영역에서는 구분할 방안이 없고 

또 감각현실은 방금 전의 내용도 지금 이 순간에 
되살려 얻어낼 수 없기에 
과거의 감각현실과 지금의 감각현실의 같고 다름도 
역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오늘 해를 보았다면 
매번 처음 저 해를 보았다고 생각해야 맞다는 것이 되고, 
그래서 오늘 대하는 해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과거에 본 해의 모습과 닮았는지 다르지를 
판단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인데, 

정말 해를 바라볼 때마다 
그렇게 여기면서 해를 대하는 것인가. 

이것이 순 억지주장을 진행시키기 위한
논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매번 본인을 대하면서 
처음 뵙겠습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이렇게 인사하지 않는 이유는 
그러면 무엇인가. 

시간이 지나면 좀 더 현명해져야 한다고 보는데 
수십년 동안 이상한 궤변만을 나열하는 것은 
정말 문제라고 본다. 

그 궤변을 통해서 현실에서 
대신 무언가 더 좋은 내용을 만들어 낸다면 
또 모르겠는데, 
그런 내용도 사실 없지 않은가. 

에노스 구절 다음에 70 세에 아들을 낳았다는 어떤 이의 
내용도 실려 있는데 
올해에는 늦동이라도 다들 하나씩 
생산해내기를 기원하면서 
글을 마치기로 한다. 



문서정보 ori http://story007.tistory.com/1097#1563
10gfl--2016-01월_댓글보전.txt ☞◆pfcf1563
θθ
 


◆vhli8137
◈Lab value 불기2560/01/04/월/08:52




○ [pt op tr]  mus0fl--Jenifer - J'attends L'amour.lrc


♥ 잡담 ♥실상논리와 삶의 목표 

prince 님이 스크립트를 안정적으로 만든다고 
작업 시간에 여유시간을 많이 부여했다더니, 
9999 개의 목록 폴더를 만드는데 9 시간이 경과해도 
종료되지 않는다. 

사진 폴더는 7 시간 정도 걸려서 다 만들어 놓았는데 
음악폴더는 현재 3336 개를 만들어 놓고 있다. 

조금 작업시간을 빨리 하면 
목록파일이 아닌 엉뚱한 binary 파일이
가끔 생성되는 것을 발견했다는데, 

그것을 찾아내는 것보다 
파일을 만들어 내는데 
여유시간을 차라리 많이 주는 것이 낫다고 본다는 것이다. 




xxx

xxx




올해 들어 해가 뜨는 장면을 오늘 아침에서야 보는 것 같다. 

작년 해보다는 많이 살이 찐 것처럼 느껴진다. 
조금 식사량을 줄이고 운동도 부지런히 해서 
살을 좀 빼어야 하리라 본다. 


사진처럼 해의 사진을 찍어 놓고 
해라고 열심히 이야기하고
해가 뜬다 진다를 이야기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해나 해가 뜨고 짐은 본래 얻을 수 없다라고 
말하면 
이 부분에서 혼동을 일으키고 
이해를 잘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지금 논의하는 오고 감이 없다라는 내용이나,
나 자신이나 목숨 생명 등을 모두 얻을 수 없으므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취하지 말라고 하는 내용이나, 
다 같은 취지의 말인데 
이것이 나열한 그 특정한 것만 그렇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경전이나 논서에서는 대표적인 것을 
제시하여 그 내용을 밝히지만, 
사실은 분별 속에서 문제삼고 거론하는 
그 모든 것이 다 같은 성격을 갖는 문제 임을 
이해해야 한다. 






꿈에서 곰의 모습을 보고 그 곰을 베개에서 찾는다면, 
그것이 잘못이라고 쉽게 생각하는 이가 

감각현실에서 자신이 일정한 관념을 일으킨 다음 
그 관념의 내용을 감각현실에서 찾는 것이 잘못임을 
쉽게 파악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꿈과 현실에서의 차이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꿈에서는 베개를 대해 곰이라고 꿈을 꾸었다 해도, 
베개의 모습을 얻는 것이 아니고 단지 
꿈에서 대한 곰의 모습만 꿈 속에서 얻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감각현실을 바탕에 놓고 
그에 대해 그것이 베개라고 생각을 갖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자신이 베개라는 생각을 일으킬 때 
그 생각은 자신이 얻는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을 나누고 묶어 
구획한 상태에서 이 관념을 대응시키는 활동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상을 취한다라고 표현하는 부분은 
이런 마음 속의 작용에 관련된다고 본다. 

본래 감각현실은 감각현실대로 정신 안에서 얻는 내용이고 
또 관념 분별 내용은 관념 분별대로 정신 영역 안에서 
일으켜 얻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을 얻는 것 자체를 문제라고 볼 것은 아닌데, 
이렇게 정신 안의 각기 다른 영역에서 얻는 두 내용을 놓고 
관념 분별의 내용이 감각현실의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이들에 대해 집착을 일으켜 행위해나간다는 부분이 
삶에서 고통을 발생시키는 원인으로 지적되는 것이다. 

그것은 변덕왕자나 변덕공주의 희망을 성취시키는 데에도 
그런 잘못된 분별과 집착이 장애를 발생시킬 뿐만 아니라, 
그런 바탕에서 감각현실을 변화시키는 행위가 
다음 생의 또 다른 고통을 만들어내는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음 생의 또 다른 고통이란, 
결국 지금 행하는 망상분별과 같은 구조에서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생에서 그 망상분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지금 생에서 행한 행위가 일으키는 결과가 주는 고통도 
역시 망상분별 안에서 마치 진짜처럼 실답게 여기면서 
받을 수 밖에 없다. 

지금 손가락이 칼로 잘라져서 피가 흐르고 고통을 느낀다면, 
손가락이 잘라진 상태에서 겪는 고통과 장애도 역시 
실답게 느끼며 그 고통을 겪을 도리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왜 손가락이 칼로 잘라지게 되었는가까지 
문제삼고 살피다 보면 
이 모든 과정이 망상분별과 그에 바탕한 집착으로 인해 
그런 결과가 연이어 발생하게 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보는 이는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인과를 보는 것 자체가 
망상분별이라고 말하는 입장이기에 
이 서로 다른 해석이 혼동을 일으키게 되기 마련이다. 

망상분별 속에서 있다고 보는 생멸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기에 

생멸과정에서 어떤 것이 원인이고 어떤 것이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지만, 

그러나 망상분별로 생멸을 보는 상태에서는 
이것과 저것을 원인과 결과로 보게 된다는
그런 입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뒷부분의 설명은 일반 세속의 분별을 받아들인 가운데 
제시하는 세속의 진리[세속제] 차원의 설명인데 반해 

이런 세속제의 내용을 바탕으로 
궁극적으로 도달시키려는 진리의 내용은 
승의제[초월적 진리, 뛰어난 진리, 궁극적 진리]라고 표현한다. 

이 승의제는 결국 많은 존재의 층에서 
가장 바탕이 되는 실재, 진여의 내용에 대한 것인데 
그것은 언어로서 기술하고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이기에 
언어를 통해 그 내용을 기술하고 표현할 수 없지만, 

그러나 중생들이 이해하고 깨닫게 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세속제와 언어를 빌려서 그것을 
설명하게 된다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언어에 집착해서 분별을 행하는 입장에서는 
혼동이 가중되게 마련이다. 

각 언어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혼동을 일으키고 
궁극적으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을 
언어로 가리킬 때는 더더욱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논의하는 대상과 주제가 
어떤 존재의 차원을 논의하고자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왜 문제되는가. 

그것을 논의하면 삶에서 어떤 효용을 얻는 것인가를 
자세히 살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베개와 꿈 속의 곰의 모습의 비유에서는 
현실에서 보게 되는 베개의 내용을 취하고 
꿈 속에서 본 곰의 모습은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고 
쉽게 보지만,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것이 뒤집혀져 바뀌게 된다.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의 내용을 취하고 
그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 진여의 내용은 
아예 생각하지 않거나, 
생각하더라도 주된 고려 대상에서 제외시키게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이가, 
어떤 베개를 벨 때마다 그 베개를 베고 나서는 
곰의 꿈을 꾼다면, 
베개와 꿈 속의 곰의 관계도 
상당히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되리라 본다. 

분명 베개인데 그러나 그것은 매번 곰의 꿈을 꾸게 만든다면 
이 베개를 놓고 곰을 관련지어 생각할 도리 밖에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prince 님이 비록 
감각현실에 자신이 생각하는 관념 그 자체는 들어 있지 
않다지만, 
그러나 그것은 
매번 일정한 관념을 불러일으키고 
또 다른 감각현실과는 분명 무언가 다른 것이라고 할 
something special 이기에 

그 something special 에 일정한 관념을 대응시키는 것은 
정당한 분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베개와 꿈의 비유와는 현실이 조금 다르다는 점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림자의 비유를 통해 
이 관계를 보아야 한다고 본다. 

사람도 보고 그림자도 보는데 
사람이 서 있으면,
그 사람으로 인해 늘 일정하다고 보게 되는(?) 그림자 모습을 얻는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모습에 그 그림자를 얻을 수 있는가. 
또는 그림자에서 그 사람의 모습을 얻을 수 있다거나, 
그 그림자를 놓고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것이 이 비유가 나타내고자 하는 취지라고 이해한다. 


그렇지 않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렇게 문제를 제기하고 그 내용을 찾아보면 
그런 내용을 얻어낼 수 없음을 쉽게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관계처럼 
실재 -> 감각현실 -> 관념 분별의 관계가 
그렇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서 사람의 모습과 그림자 가운데 
무언가에 대해서 집착을 갖는 이가 있다면 
우선 어느 쪽을 실답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제시하게 되는가. 

당연히 그림자 쪽이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가 매번 그림자만 집착하면서 
그림자 밟기 놀이를 행하면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단순히 그것만 문제가 되지 않고 
더욱이 그 행위로 인해 
길에 뛰어 들고 자동차 사고가 나고 
자신이 집착하는 그림자 내용마저도 
매번 자신이 원하지 않는 흉칙한 그림자만 
대하게 된다면 더더욱 문제라고 보게 된다. 

안타깝게 현실에서 
감각현실과 그에 대해 일으키는 관념 분별 
그리고 그 관념분별에 바탕하여 
행하는 행위내용 (뜻, 말, 태도, 행위 )
그리고 그로 인해서 나타나는 다음의 내용들이 
모두 그런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가정하여 만일 그렇지 않다면,
즉 그런 망상분별로 인해
그 주체가 지금도 고통을 받지 않고
나중에도 긴긴 고통을 헤매 돌아다니지 않는다면,
이 망상분별은
유익한 취미생활로
오히려 권장해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시인이 늘 엉뚱한 생각을 일으켜 
시를 씀으로써 
생계도 해결하고 
더 나아가 다른 여러 사람들의 
마음도 깨끗하게 만들고 
아름답고 선하고 가치있게 다 만들어 낸다면, 
그런 망상분별을 더욱 권장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분별 영역에서 행하는 활동이
그런 성격을 갖는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보지만, 
현실에서 대부분 생명이 행하는 분별 활동은 
그렇지 못하기에 그것을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누가 현실의 고통을 만들었는가. 
이 문제를 따지면 안타깝지만, 
그런 망상분별에서 
그렇게 좋음을 추구하고 행해 나가는 
각 생명이 자신의 고통과 다른 생명의 고통을 
만들어 내는데 분주히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한우 사랑을 이야기했는데 
자신이 한우를 사랑한다면서 
매번 한우를 잡아 죽이고 
그에 대해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 현상은 

치킨을 사랑하는 모임이나, 
회를 사랑하는 모임이나 
다 대부분 성격이 비슷하다. 

물론 이들이 입장을 바꾸어 
상대의 위치에 놓일 때는 
그것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정작 이 상황에서는 또 왜 자신이 
그런 상태에서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는 지 
이해를 못하고 고통을 반복해 겪는다는 점이 

바로 현실의 문제점인 것이다. 

누구의 무엇이 현실의 고통을 만드는가. 

이 퀴즈는 
망상분별을 일으킨 생명이 행하는 업이 
그런 고통을 만든다라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탐정은 매번 범인을 체포하러 나서게 되는데 
진정한 명탐정은 
매번 각 생명의 마음에 들어 있는 
망상분별과 
이에 바탕해 일으키는 
탐욕과 분노 어리석은 견해를 
그 근본 원인이자 범인으로 체포해 오게 되는 것이다. 

실재에 대해서 엉뚱한 주장을 누군가 할 때 
이것을 깨뜨리는 논의가 필요한데 
사실 올바른 주장이 하나라고 한다면 
엉뚱한 주장은 무한하고 
그런 주장을 제시하게 되는 원인도 
또 대단히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수학문제가 하나 있을 때 
학생들 가운데 이 문제를 올바로 풀고 
올바로 답을 제시하는 이는 적고 

엉뚱한 풀이와 엉뚱한 답을 적어 놓고 
시험지를 제출하는 이는 대단히 많은 것처럼 

실재와 감각현실 관념 분별 등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시험 문제에 엉뚱한 답이 수없이 많다고 
그 각각을 다 논의대상에 올려 놓고 
논의하는 것이 곤란한 일인 것처럼 

실재에 대해 제시하는 엉뚱한 주장이 수없이 많다고 해서 
이것 하나하나를 다 나열하고 이것을 
논파하는 노력이 곤란한 것도 사정이 같다. 

그래서 하나의 주제를 놓고 논의할 때 
그 내용은 다른 망상분별에도 모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베개와 꿈에서 본 곰의 모습을 놓고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야 하는가가 문제로 제출되면, 
꿈에서 본 곰의 모습이라고 적어 놓으면 
이것은 좀 문제가 된다. 

그런데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그리고 이것을 일어나는 원 바탕이라고 보는 실재를 놓고 
이런 질문을 하면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내용에서 
자신의 삶의 목표를 나열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삶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문서정보 ori http://story007.tistory.com/1097#8137
10gfl--2016-01월_댓글보전.txt ☞◆vhli8137
θθ
 





◆vhct2038
◈Lab value 불기2560/01/04/월/00:30





○ [pt op tr]  mus0fl--L'Affaire Louis Trio - Tout Mais Pas Ca.lrc


♥ 잡담 ♥일출과 파사현정


 
새해에 일출 장면을 보려고 했지만, 
미세먼지와 안개에 가려 보지 못해 아쉬움을 느낀다. 


그런데 옥상 창고 한쪽에 동방의 보성여래님을 
산성비를 피해 모셔 두었는데 
생각해보니, 본인이 동방에 빛을 켜고 끄는 권한이 있음을 생각하고 
본인이 전구를 켜면 그것이 곧 일출장면이 아니겠는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냥 새해의 해를 찍으면 그것이 새해 해 사진이 아니겠는가.




쉬는 날 숙왕화님에게 스타워즈란 영화나 같이 볼까 
물어보니 이미 보았다고 한다. 

no 님과 셜록홈즈 영화를 보러 갈 예정인데 
같이 갈 생각이 있으면 가자고 하는데 
셜럭 홈즈는 왠지 골치가 아플 것 같다. 

추리 소설 작성법은 사실은 간단하다. 

나쁜 일을 하기는 하는데 
체포되지 않으려고 
굉장히 잔 머리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먼저 소설가가 잘 구상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탐정 역할을 하면서 
이것을 하나씩 알아내는 것처럼 
쓰는 것이다. 

그런데 읽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조금은 답답하게 여기다가, 
소설가가 제시하는 해법에 흡족해 하게 하는 것이다. 

소설가는 자신이 범죄도 구성하고 
수사도 담당하기에 그것이 그렇게 쉽게 생각될 수 있는데, 
그러나 현실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엉뚱한 수사가 이뤄지기도 하고 
엉뚱한 재판이 이뤄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수사관이나 재판관이 
직접 그 범죄 시점에 가서 
모든 것을 확인할 도리는 없기 때문에
그런 한계를 갖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정한 내용을 가지고 
자신의 경험 내용을 토대로 이런 추리를 한다. 

추리는 자신이 파악한 내용을 
다른 곳에 연장시켜서 비례해 적용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무거운 것을 던지고 
깃털을 아래에 던지니, 
무거운 것이 먼저 땅에 닿는다. 

그래서 그것이 맞다면, 
10 원 짜리 동전을 던지고 
1kg 금괴를 던지면 
1kg 짜리 금괴가 먼저 땅에 닿을 것이다. 

이렇게 추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을 보게 된다 .

또는 모든 것은 손에서 놓으면 
발 쪽으로 떨어지니, 
우주선을 타고 갈 때도 그럴 줄 알았는데 
또 이번에는 그렇지 않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추리가 맞을 때도 있고 
맞지 않을 때도 있음을 알게 되는데 
여기에서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경험하여 확인하지 못하는 내용에 적용시킬 때는 
무언가 먼저 필요한 내용이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과
추리를 적용하고자 하는 대상의 내용이나
그것이 놓인 상황 조건이 같아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실상논리에서도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오류의 판단을 쉽게 범하는 것을 
보게 되고 
또 이것을 주로 지적하게 된다. 

이전 글에서 존재가 문제되는 다양한 영역의 내용을 
보았는데 

주로 사람들은 한  영역에서 얻는 내용을 
다른 영역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배 고플 때 짜장면을 먹으니 기분이 좋았다. 
=>  그래서 짜장면이란 기분 좋은 것이다라고 생각하거나, 
짜장면에는 기분 좋음이 들어 있다거나, 
좋음이 있다거나, 
심지어 짜장면이 기분 좋아한다는 식으로 엉뚱한 생각을 한다. 

한우 사랑이란 표어를 많이 보는데 
사람이 한우를 사랑한다고 
한우가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다. 

여하튼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추리하기에 
망상분별이 시작되고 증폭되어 나가게 된다. 

추리를 하려면 양 영역간에 
최소한 하나라도 서로의 관계를 이어줄 내용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런 전제를 하나도 확보하지 못해도 
무조건 적용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바로 실재에 대한 내용이 무엇무엇이라고 
주장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자신이 이러이러한 감각현실을 얻었고 
또 그에 대해 그것이 이러이러하다고 생각하기에 

그 실재도 그러하다는 것이 그런 추리인데 
이것이 바로 실상 논리에서 주로 그 오류와 잘못을 
지적하는 주된 내용이 된다. 

사실 감각현실에 대해 일정한 관념 분별을 할 때부터 
감각현실과 관념 분별 사이에서는 그런 잘못된 판단이 
행해진다. 

하나의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놓고 
사람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묶고 나누어 보는가에 따라서 
무수하게 다른 관념 분별을 행할 수 있게 되는데 

그러나 각 부분에 대한 관념을 모아 놓는다고 
전체의 관념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것이 서로 뒤범벅이 되는데 

그러나 그런 관념 분별을 행하는 이는 
자신이 그렇게 묶고 나누어 분별할 때마다 
그 관념에 해당한 내용이 그대로 감각현실에 있다고 
굳게 믿어 버린다. 

이것은 사실은 
꿈 속에서 곰의 꿈을 꾸고 나서 
베개에 그 곰이 있다고 믿는 것처럼 엉뚱한 생각인데, 

그러나 감각현실과 관념 분별이 그런 관계라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행하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는 
꿈과 성격이 비슷하지만 꿈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환영과 같고 그림자 같다고도 비유하는데 
이 비유가 더 어렵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서 있을 때 그림자가 생긴다면, 
그 그림자는 그 사람 때문에 생기는 것인데 
그러나 그림자가 그 사람은 아니다. 

그 사람에서 그 그림자를 찾으려고 한다면 
찾지 못한다. 

꿈에서 본 곰의 모습도 베개를 베고 자면서 얻은 것이기는 하지만,
꿈을 깨고 나서 베개에서 곰을 찾으려고 한다면 
찾을 수 없다. 

그런데 감각현실과 관념은 
이와 비슷하지만, 또 이들과는 다르다. 

현실에서 사람은 
감각현실의 내용을 한편으로 배경으로 얻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에 대해 관념분별을 행하기에 

이 두 내용을 모두 얻는 가운데 
일정한 관념을 
일정한 부분의 감각현실에 계속 대응시키면서 
그런 분별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베개를 놓고 베개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 
사실은 베개를 놓고 꿈 속에서 본 곰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는 것을 잘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이처럼 그 내용이 서로 각기 다른 여러 영역의 내용을 
다 함께 얻을 때 
그 가운데 무엇을 중심으로 취하고 
나머지를 꿈의 내용처럼 그 내용을
실답지 않은 내용으로 집착을 버려야 하는가가 
문제될 때,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망상 분별을 일으켜 가진 
관념분별을 기준으로 잡고 
나머지 내용을 판단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이것이 잘못된 입장이라는 것이 
바로 반야심경의 가르침이기도 하고 
용수논사가 밝히는 실상의 논의이기도 한 것이다. 

노래를 듣다 보니 
자꾸 파사~~ 이런 소리가 들리는데 

용수논사의 중론송의 입장을 
파사현정의 입장이라고 보통 말한다. 

삿되고 잘못된 견해를 깨뜨리고 
올바른 깨달음을 드러낸다는 
입장이 곧 용수논사가 행하는 논의의 
기본 취지이자 입장인 것이다. 

앞에서 여러 비닐 층의 내용이 포개어지고 겹쳐져
하나의 그림이 되는 것을 말했는데, 

파사현정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면 
고통의 윤회를 무한히 밟아 나가게 되니, 

가장 기본되는 바탕내용을 취하고 
나머지는 그에 바탕해 근거없이 
물거품처럼 그림자처럼 환영처럼 
꿈처럼 아지랭이처럼 환상가 건 최면내용처럼 
그렇게 실답지 않고 부질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내용인데, 

그것들은 하나같이 그 영역에서 
그것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그렇게 나타나는 것임을 깨닫고 

이에 집착하지 않고 
가장 근본 되는 층의 내용을 취해 
평안한 니르바나에 머무르고 

또 나머지 영역에서의 내용은 
그 안에서 중생을 제도하고 성불하기 위하여 
복과 지혜를 얻기 위한 
올바른 수행방안을 취해서 
좋고 좋고 좋은 내용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 
수행의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한 사람이 얻는 내용은 
그것이 감각현실이던 
또는 관념 분별이던 
또는 느낌이던 
그 모든 것은 
그 주체의 마음 안에서 얻고 머무는 것인데 

이들 내용이 가장 기본 바탕이 되는 실재의 영역 안의 
내용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가 주된 논의 대상이 된다. 

가장 기본 바탕되는 layer(층)의 내용은
전혀 없는 것이 아닌데
그러나 한 주체의 정신은 이에 관계하여 내용을 직접 얻어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 주체의 정신과
그 정신이 얻는 내용은 색,수, 상, 행, 식이라고 한다면, 
이것들은 그런 실재는 아닌데  

그러나 이런 정신과 정신 안의 내용은 
또 이런 실재를 떠나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관계로 이들 정신과 정신 안의 내용은 
곧 실재와 다르지 않다고 할 것이고 
또 실재는 이들 정신과 정신 안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으며, 
이들 내용은 곧 실재이고 
실재는 곧 이들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또 실재 안에 이들 정신과 정신이 얻어낸 내용이 
그대로 있다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관계가 곧 반야심경에서 
제시되고 있는 내용이다. 

물론 반야심경에서는 곧바로 색불이공 공불이색...
이렇게 결론적 내용이 제시되지만, 

왜 이런 내용이 제시되는가에 대해서는 
앞처럼 각 layer의 내용이 서로 갖는 관계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은 또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즉 정신이 이 실재와 관계하여 정신 안에 
일정한 내용을 얻는다고 추리할 때 

이 정신이 마치 실재와는 별도의 존재여서 
실재와는 별도로 따로 떨어져
이런 변화를 이루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정신은 정신을 직접 파악하지 못하고 
단지 정신 안에 변화된 내용을 얻어 비추어 보여주는 것이지만, 
이런 내용 자체도 역시 실재를 떠나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에 
위와 같은 관계를 다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사라지다가
눈을 뜨면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할 때 
왜 이렇게 그런 모습이 나타나 보이게 되는가. 

생각하면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왜 나타나는가?

그 의문에 대해 
이런 노래로 답할 수도 있을 지 모른다. 

별들에게 물어봐, 별들은 알고 있어~~
눈들에게 물어봐 눈들은 알고 있어~~
마음에게 물어봐 마음은 알고 있어~~

우리는 이미 내용을 파악한 가운데 
빛이나 모습(대상)이나, 눈이나, 마음을 하나씩 
제거하면 이들을 얻지 못한다고 여기기에 
이들이 이 모습을 얻게 하는 내용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마음 안에서 보는 내용이 
마음 안에 이런 내용을 얻게 했다는 것은 
잘못된 추리의 하나이기도 하다. 

지금 문제삼는 것은 
마음 안에서 보는 내용이 
무엇에 의해 그렇게 나타나게 되는가를 
문제삼는데, 
문제에 대한 답을
문제내용 그 자체로  제시하면 올바른 답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 바로 실재에 대한 추리를 할 때 
이처럼 자신이 이미 얻은 내용으로 
이리저리 분별한 내용을 가지고 
나아가기에 

이것이 모두 엉터리 추리가 되고 
용수논사가 파사현정을 하기 위해 
애쓰게 되는 엉터리 주장들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엉터리 주장들이 
현실에서는 대단히 표준적이고 상식적인 
옳은 내용이라고 굳건하게 믿어지고 
심지어 각 학교나 대학교 연구실에서도 
전혀 이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대부분의 내용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 저기서 이쪽으로 걸어 오고 또 저쪽으로 걸아가는데 
옴이 없다거나 감이 없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사실은 이런 망상분별상태를 
깨뜨려주기 위하여 행하는 논의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힌트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당신이 저쪽에서 사람이 온다고 보았을 때 

손가락만한 사람이 
점점 팔뚝만 해지다가 
나중에는 또 손가락만 한 크기로 사라지지 않았는가. 

당신이 명탐정이라면 
현실에서 늘 보는 이런 이상한 내용에 대해 
일단 깊이 의문을 일으켜 가져야 한다. 

그리고 어떤 이나 자신에 대하여 
손가락 크기부터 팔뚝 그 이상으로 자꾸 달라지는 

이런 수많은 모습들에서 
그 진실한 모습은 어느 것인가를 진지하게 
깊이 생각해야 하고 

그런 관찰의 상황에서
왜 자신은 늘 자신의 뒷머리 부분을 
직접 보지 못하는가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추리 소설에서 
처음 제시하는 약간의 복선이 깔린 
힌트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왜 분명 범인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걸어 간 것처럼 여겨지고 추리되는데 

이 범죄 현장에서 명탐정 용수보살은 
여기에 범인의 오고 감이 없다고 말하게 되는가. 

관자재 보살은 또 왜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을 말하면서 
다 체포한 범인을 석방시키는가. 

이런 여러 문제를 
깊이 있게 살펴야 한다고 본다. 


일전에 실수로 삭제해버린 
슬라이드쇼 목록을 다시 만들기 위해서 
스크립트를 실행하는데 
전과 달리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9999 개만 만들어 두려고 하는데 
이런 추세로 나아가면 한 6 시간을 작업해야 
다 만들어질 것 같다. 

물론 지금 9999 개의 폴더가 다 필요한 것이 아닌데 
prince 님의 말에 의하면, 
미리 만들어 두고 사용하는 것이 
사용에 편하다고 해서 미리 만들어 두려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에 실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미리 마음 속에 그리는 가운데
자신이 목표로 하는 내용이 마음에 먼저 떠오르고 
그에 맞추어 지금 필요한 행위를 찾아 행해 나간다는 관계를
현실에서 보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자신이 도달할 목표지점을 
감각현실이나 관념 영역에 두면 
그것이 실답지 않기에 매번 흔들리고 
그에 따라 자신은 매번 불안함을 겪게 되기 마련이다. 

변덕왕자나 변덕공주가 현실에서 겪는 
고통의 내용이 대부분 이런 이유에서 발생한다. 

어제는 그런 마음이 들었는데 
오늘은 왠지 마음이 달라져 버리는 것이다. 

세상의 수많은 연인들이 뜨겁게 서로 사랑할 때처럼
이후에도 마음이 늘 그대로 유지된다면 좋을텐데,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부처님은 이처럼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살아가게 되는 중생들을 대상으로
이들이 현실 생활에서 사용하면 좋은 결과를 얻는
일종의 생활의 지헤를 제공해주는 입장이라고 보아도 좋다고 본다.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생사 생멸이 없고 고통이 없는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란, 
그것이 곧 실재 진여의 층의 내용이고 
또 감각현실의 층의 내용이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실재의 내용은 각 생명이 
그 자신의 정신으로는 아무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기에 
아무 것도 없다고 잘못 생각하기 쉽지만, 
그러나 자신이 직접 내용을 얻지 못할 뿐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비록 망상분별에서 
얻는 내용에 더 의미를 두고 집착을 일으켜 추구하기 쉽지만, 
그러나 이렇게 되면 고통의 생사 윤회를 무한이 밟아 나가게 되므로, 

이를 제거하고
대신 고통이나 생멸 생사를 얻을 수 없는 
청정한 진여 니르바나를 먼저 얻어 여여하게 머무르게 되는 상태를 
먼저 기본 목표로 해야 한다. 


한편, 이 실재 진여 레이어(층) 영역을 통해 
청정한 진여를 확보한다고 하여 

다른 레이어 층의 내용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이를 통해서 
더 좋고 좋고 좋은 내용을 잘 얻어낼 수 있게 되고 
그리고 이처럼 복과 지헤를 원만히 성취하여 
다시 다른 고통받는 중생을 
평안하고 안온한 니르바나에 이르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또 하나의 목표점이 된다. 


수행자가 구상하는 소설의 종착점은 
이처럼 아개령입 무여열반의 작전과 
중생제도와 성불의 목표점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소설가가 먼저 초점을 정해 맞추지 않으면 
현실의 수많은 망상분별에서 
방향을 잡아 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노래에서 반복해 말하듯 
수행자가 파사현정의 노릇을 하면서 
자꾸 no, no, no 라고 부정해 말하는 것은 

그것이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한 목표나 실현 방안들이기에 
그런 것이고, 

그것을 중지시키고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복과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방향의 노력은 
또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 부분에서 prince 님이  
한 번 no를 말했으면 
현실의 모든 부분에서 모두 no 를 말해야 
논리과 일관된다고 자꾸 비판하지만,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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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gfl--2016-01월_댓글보전.txt ☞◆vhct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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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qrb1819
◈Lab value 불기2560/01/02/토/21:33



○ [pt op tr]  mus0fl--Yves Montand - La Bicyclette.lrc


♥ 잡담 ♥수행자의 두 문제 

수행자에게 공분 무안의 마음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요즘 앞글자만 떼내 글자를 만드는 방식으로 
만든 신조어다. 
공한 실상을 꿰뚫어 분별하고 
무여열반에 안온하게 안주한다. 
이런 말의 앞글자만 떼낸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두 측면의 어려움이 있다고 본다. 

현재 prjna 님의 사진을 특수 처리해 주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하나의 특수효과를 적용할 때 
기본 바탕화면을 layer 로 만들고 
특수처리를 할 때마다 별도의 layer 를 사용하면 
나중에 다시 이용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수정작업을 할 때도 
작업이 편하게 된다. 

얇은 비닐에 각기 다른 그림을 그린 다음 
이것을 포개 놓으면 하나의 그림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때 그 때 필요에 따라 어떤 층의 비닐그림은 빼낸다던지 
다른 비닐 그림을 올려 놓는다던지 하면 
전체 그림이 달리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만화영화에서 연속된 그림을 그릴 때 
배경화면을 하나의 비닐에 그려 놓고 
움직이는 동작만 비닐위에 그려가며 변화를 주면 
동작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지금 여기서 설명하는 layer 라는 개념은 
포토샵을 사용하여 그림 편집을 하는 이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기에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비닐 layer 를 여러 장 포개서 
하나의 그림이 나타나게 하는 방안은 
그림 편집 과정에서 사용하는 기법인데 

이것이 우리가 실상 논리와 망상 분별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서도 유효하다고 본다. 

현실에서 우리가 대하는 내용에는 
각기 차원이 다른 영역에서 얻는 내용이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이처럼 다양하게 겹쳐서 
동시에 얻고 이를 해석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릇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는데 
쟁그렁 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발에 아픔을 느끼고 
크게 다치지 않았을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할 때 

눈으로 본 모습은 눈을 통해 
소리는 귀를 통해 
아픔은 발의 촉각을 통해 
그리고 이에 대한 생각은 의식 안에서 행해진다고 할 것인데 
이런 각각 차원이 다른 영역의 내용이 
마음 안에서는 동시에 얻어지는 내용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신이 눈으로 본 그 그릇의 모습이  
그런 소리를 냈다고 잘못 여기고 
그 그릇의 모습이 자신의 발에 부딛혀 자신의 발을 아프게 했다고
잘못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어떤 소리가 그런 그릇의 모습을 보이게 했고 
자신의 발을 아프게 했다거나, 

또는 자신의 발에 닿은 촉감의 느낌이 
그런 모습을 보이게 하는 것이거나, 
그런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처럼 
잘못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우리가 생활하는 데는 
오히려 앞에 처음 한 판단이 
정상적인 옳은 판단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 뿐이다. 

그런데 눈으로 얻는 색깔과 소리 촉감 등이 
자신의 감각을 하는 정신의 층에서 얻는 내용이라고 할 때 
이를 앞의 그림 편집 과정에서 사용하는 
각기 다른 비닐에 그려진 내용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렇게 각기 다른 존재 영역을 생각하면 
처음 자신의 감각기관이 관계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신과 관계없이 
무언가 그 자체로 있다고할 그 무엇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것을 실재라고 표현할 때 
사람은 그 실재에서 이런 감각내용을 얻는 것이고 
곤충은 곤충대로 그에 대해 그 곤충의 감각내용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존재하는 여러 내용을 나열할 때 
이런 실재의 층에 있는 그 무엇을 가장 밑바탕에 놓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실상 논리의 기본적 내용이기도 하다. 

 

08pfl--image/존재의_영역_설명.png
[img2-01] 08pfl--image/존재의_영역_설명.png



우리가 현실에서 얻는 수많은 내용은  
위 그림과 같이 여러 층(layer)에서 얻는 내용을 
포개어 놓고 얻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실재는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고 
우리는 우리의 정신 안에서 그 내용을 얻는 내용으로
감각현실과 관념 분별 등을 얻는 것이다. 

여기서 수행자가 갖는 문제란, 

본래 생사나 생멸, 고통을 얻지 못하는 청정한 진여의 내용을 
취하고 
나머지 영역의 내용을 이에 상응하게 만들어 , 
나머지 영역에서의 내용에서도 평안하게 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에서 자신을 자극하고 
탐욕이나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여러 현실의 내용에 대해 
그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그것을 무시하고 그로 부터 탐욕과 분노에 바탕한 
반응을 하지 않는 수행 자세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사실은 쉽지 않다. 

본래 실재의 층의 내용이 공하다는 것을 관하여 
일체의 고액을 벗어나 건너간다는 의미는 
결국 현실에서 그런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 
실재의 내용에 상응하여 임한다는 노력을 통해 
모든 고통과 재앙을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현실에서 위와 같이 다양한 내용을 겹쳐 얻는 상황에서 
기본 바탕의 실재 층의 상태에 상응하게 
나머지 내용을 취급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이론과 현실이 수행과정에서 많이 차이나는 부분이 
이 부분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어려움은 
그렇게 현실에서 청정한 진여에 상응하게 
여여한 니르바나의 상태로 임하면서도 

다시 중생제도와 성불을 목적으로 
다른 존재 영역의 layer 에서 문제되는 내용을 
모두 원만히 잘 성취하여 나가야 한다는 점이 또 문제라면 문제다. 

그것은 결국 수행자가 복과 지혜를 구족하여 

현실에서 중생들이 집착하는 바를 
잘 성취시키고 이를 계기로 
다른 중생을 무여열반의 상태로 이끄는 방편을 
잘 성취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중생의 소원이 무한하기에 
번뇌가 무한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에 응해 
수행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도 무한하게 
나열되게 마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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θθ
 


◆vtaa4822
◈Lab value 불기2560/01/01/금/06:52





○ [pt op tr]  mus0fl--Sylvie Vartan - La Drole De Fin.lrc


♥ 잡담 ♥2560년의 시작

잠을 자고 일어나니 새해가 시작되었다.
새해를 맞이하여 올해는 지난해와 다른 연구 자세로 연구에 임할 생각을 하게 된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좀 많이하고 
무한동력사업에 치중하고, 
조금 깊이 있는 연구를 전개해나갈 생각이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새해 맞이하는 해는 사진찍지 못했는데 
지난 해에 찍은 해 사진을 대신 올린다. 
 



이것은 방치한 컵에 물이 얼고
그 아래에 가라앉은 침전물인데, 
넓은 세계에서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도 이와 같이 
작은 먼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 논의하는 실상논리의 입장에서
이처럼 크고 작음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망상분별이고 희론임을 지적하게 된다. 

왜 그러한가. 

관념에서 크기를 재는 잣대는 본래 
그 관념의 크기를 잴 수도 없고
또 그 크기가 일정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크기를 재는 잣대란, 
우리가 눈을 떠서 보는 감각현실에서 
비교적 일정하다고 보는 것을 기준으로 잡고 
이것과 비교하여 그 크기를 측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감각현실은 모두 자신의 마음 안에 
얻어진 감각내용들이다. 

결국 이는 자신의 마음 안에서 마음안의 내용을 
서로 비교하면서 그 크기를 헤아리는 것인데, 
그것은 감각현실 안에서 그런 것을 얻어서 행하는 것이 아니고 
이들 감각현실을 배경으로 놓고 
관념영역에서 관념분별로 그런 비교 분별을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손가락 하나로도 해가 가리워지고 
사람도 손가락만 하게 보이다가, 팔뚝만 하게 보이는 등으로 
사실은 오락가락한데 
원근법을 적용하고 일정한 자대를 기준으로 이것을 비교하여 
그 크기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해를 직접 가서 그 크기를 자로 재보는 것이 아닌데 
그 크기를 말하는 것은 
물론 앞과 같은 비교를 바탕으로 
이런 관계가 다른 곳에서도 비례해 적용한다고 추리하여 
그런 내용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삼각형을 그려 놓고 그 각도가 유지되면 
현재 측정할 수 있는 내용과 그런 비례관계가 계속 유지된다고 
하는 전제가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추리가 유지되려면 먼저 확인되어야 할 내용이 
많은데 사실 그것을 모두 요구하면 
과학적 연구는 곤란하게 될 지도 모른다. 

우리는 물에 젓가락을 넣으면 
젓가락이 휘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을 관찰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 방향으로 손을 반듯이 뻗으면 
역시 자신의 손도 그처럼 휘어지게 보이고
또 그렇게 보이는 물건을 잡을 수 있고 
그 목표하는 것에 손이 닿을 수 있음을 확인한다. 

공중에 오아시스가 보이더라도 
정말 빛이 알려주는 방향대로 나아가면 
빛이 꺽이는 부분에서 자신도 꺽일 것이고 
그래서 오아시스에 도달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오아시스가 공중에 있는 것은 또 아니다. 

단지 걸어갈 때는 그렇게 빛이 보이는 대로 
빛이 꺽이는 부분에서 자신도 꺽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빛을 통해 자신이 보게 된 모습은 
빛이 꺽이지 않고 반듯하게만 온다고 여겨 
그것이 공중의 방향에 있다고 생각하여
그런 착각을 일으키는 것 뿐이다.

신기루나 아지랭이 등도 마찬가지다.

이는 결국 매질의 차이에 의해 
빛이 꺽이는 현상인데 
그래도 빛은 늘 일정하게 직진하는 것이라고 주장된다. 

이처럼 현실에서 빛이 곳곳에서 꺽임을 보면서도
그래도 빛은 직진한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이는 자신이 관측하는 온 공간에서 매질이
모두 동일하면 그 안에서 빛이 직진한다고 본다는 것인데

그러나 그런 주장을 하기 위한 전제로서
온 공간의 매질이 다 동일하다는 것은
또 무엇이 보장해주는가.

우주에 설마 놀이동산에서 보는 마법 거울이
장치된 것은 아니라 해도,
또 그런 것이 전혀 없다고 누가 가서 확인해주는가.

이 확인과정에서도 역시 앞과 같이
빛이 보이는 대로 그 방향으로 나아가면
마법 거울 속에서도 조금 돌고 돌겠지만,
보이는 곳에 도달하게는 될 것이다. 

이 이상한 퀴즈 문제는
우리가 모든 판단을 진행하는 기본 자료자체가
처음 감각현실을 얻는 과정에서부터
뒤바뀐 상태로 얻는다는 점에서 시작한다.  

우리의 삶은 여기에서 출발하고 
또 여기에서 마치게 된다.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다른 생명이
다른 눈이나 다른 기관으로 얻는 감각현실이
무엇인가를 직접 자신이 얻어낼 도리가 없다. 

더욱이 이들 감각기관을 의존하지 않고 
그 실재를 직접 얻어낼 도리도 없다. 

그런데 이것이 실상논리에서 초점을 맞추게 되는 
주된 부분이기도 하다. 





본래 색이나 소리로 
여래를 찾는 것은 
삿된 방안이라는 내용이 
경전에서 제시된다. 

상을 놓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 
이를 우상숭배라고 부정하는 종교도 있지만, 
위와 같은 경전 내용은
이런 입장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불상을 조성하고 공양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불상을 대하고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올려 되새기되, 
그러나 그 상이 곧 부처님의 진실된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망상분별에 바탕하여 
수행을 하는 수행자입장에서는 
부처님이니까 아무렇지도 않지 
한 겨울에 수행자가 저렇게 있으면
얼마나 추울까.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 





한해의 마지막 해를 보기 위해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떠난다거나,
또는 새해 처음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떠나가는 이가 많다. 

본인도 무한동력사업을 떠나는 입장이라면 그렇게 했을텐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라, 
그냥 해를 찍어 보았다. 

어린왕자라는 소설에서는 어린 왕자가 해가 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작은 소혹성에서 계속 자리를 옮겨가면서 
해가 지는 모습을 구경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는데 
우리도 그런 방안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지구를 계속 반대방향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또 아니다. 

이런 여러 입장을 생각하면 
그냥 낮에 사진을 찍어도 그것이 
그런 일몰 사진의 하나라고 여겨도 무방한 일이기도 하다. 
저 해가 어떤 위치에서는 
올해의 마지막 해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비둘기 네마리가 날라와 이런 본인의 생각에 동의를 표한다. 
한 마리는 다른 각도에서 사물을 보기 위해 
바로 날라가 버렸다. 

본인이 이런 설명을 덧붙여 놓지 않으면, 
날라간 새 한 마리는
이 사진에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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